•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4 ‘서양과학’의 도래와 ‘과학’의 등장
  • 03. 근대의 계몽인가, 계몽된 근대인가?
  • 우두법과 지석영
문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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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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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의 우두법에서 지석영의 활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우두법의 도입과 정착 과정을 여러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로 지석영의 기여도를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다. 19세기 조선의 우두법 정착 단계는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개항 이전에 우두법이 비공식적으로 소개된 시기이다. 둘째는 개항 직후(1876∼1884) 몇몇 우두 학습자가 민간 차원에서 우두법을 시술한 시기이다. 셋째는 정부 차원에서 전국의 영아를 대상으로 의무 접종을 실시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던 시기(1885∼1893)이다. 넷째는 갑오개혁-대한제국 전반기의 ‘종두규칙’과 ‘종두의양성소규칙(種痘醫養成所規則)’에 입각해서 조선정부가 우두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던 시기(1894∼1905)이다. 다섯째는 통감부 경찰의 활용으로 우두법이 강제적으로 시행된 시기(1906∼1910)이다. 대체로 처음의 세 시기는 우두법에 대해 알아 나가고 그것을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였으며, 나중의 두 시기는 우두법이 실질적으로 민간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시기였다. 이 중 특히 둘째, 셋째 기간 중 지석영의 활동(1879∼1887)이 주목된다.

조선에서 우두법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정약용의 『마과회통』의 부록에 실린 토마스 스탄튼이 한역한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1828)이 분명하다.210) 김두종, 「우리나라의 두창의 유행과 종두법의 실시」, 『서울대학교 논문집』 인문사회학 4, 1956, p.51. 이 책에는 우두 접종법, 접종의 성공을 가려내는 법, 접종 후 금기 사항, 소아의 접종 부위, 접종 기구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시행 여부에 관한 정보는 없다. 다음에는 최한기의 『신기천험』(1866)에 우두법이 소개되었다. 그 내용은 정약용의 것보다 훨씬 상세하며, 특히 서양 관련 내용이 등장하는 우두의 내력이 삭제되지 않은 채로 실려 있다. 이 역시 시행 여부가 불투명하다. 개항 이전 우두법의 시행을 일러주는 기록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이 책은 북쪽 국경 지방과 강원도 지방에서 우두법이 실시되고 있다는 내용을 적었다.211)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권11, 동국문화사 영인본, pp.376∼377. 그렇지만 서학 탄압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두법은 널리 확산되지 못하였고 제도적인 정착을 보지 못하였다.212) 신동원, 『한국 근대 보건의료체제의 형성, 1876∼1910』,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20.

개항 직후에는 민간에서 여러 사람이 우두법을 시행하였음이 확인된다. 잘 알려져 있는 지석영과 그 밖의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등이 그들로 주로 1880년대∼1890년대 초에 우두 시술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개항 전후 청이나 일본을 통해 우두법을 배웠다. 여러 인물 중 이재하가 주목된다. 그 스스로 지석영보다 일찍이 우두법을 시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석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1876년 수신사 일행을 수행한 박영선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우두법의 존재를 알았고, 이어 1879년에 부산 일본인 거류지의 제생의원을 찾아가 우두법을 학습하였으며, 1880년에는 수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가서 우두백신 제조에 관한 일체를 학습하였다.213) 기창덕, 「국가에 의한 서양의학 교육」, 『의사학』 2권 1호, 1993, p.25∼27. 이유현은 1881년에 중국에서 우두법을 학습하였다.214) 김두종, 앞의 책, p.57 재인용.

비록 지석영보다 먼저 우두법을 배운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있고, 지석영과 비슷한 시기에 우두법을 시술한 사람도 여럿 있지만, 이 시기 우두법 도입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석영이다. 조선에 최초로 우두법을 도입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두법이 정부의 사업으로 채택된 것이며, 지석영은 그것이 이루어지는 네트워크 안에 있었다. 지석영은 우두법에 관한 정보를 정부측 인사(박영선)로부터 들었으며, 본격적인 우두법 학습을 정부 활동의 일환(수신사)으로 학습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직후 조선 정부는 서양 의술을 시술하는 제중원, 항구를 중심으로 한 검역 활동과 함께 우두법의 전국적인 실시를 꾀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1885∼1890년도 조선 정부의 우두사업은 북으로는 간도, 남으로는 제주도에 미칠 정도로 전국적 규모로 시행되었다. 1군에 적게는 1명, 많게는 3명 정도의 우두의사가 파견되어 모든 영유아를 대상으로 우두접종을 실시하였다.215) 신동원, 앞의 논문, p.86. 1885∼1886년 지석영은 우두의 전도사로서 주역을 담당하였다. 1885년 지석영은 충청도 우두교수관이 되어 충청도 전역을 커버하는 우두의사를 양성해냈으며, 『우두신설』을 지어 우두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하지만 1887년 이후 지석영은 정부의 우두사업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갑신정변 배후 인물의 하나로 탄핵 받아 강진의 한 섬(신지도)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216) 기창덕, 「지석영 선생의 생애」, 『송촌 지석영』, 의사학회, 1994, p.33. 1892년 유배에서 풀린 후 지석영은 한성에서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차려 놓고 개인적으로 우두시술을 하였지만,217) 기창덕, 앞의 글, p.36. 더 이상 그는 정부가 펼친 우두사업의 주역이 아니었다.

조선의 우두법 정착과정에서 1894∼1905년은 매우 중요하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전국민의 의무 접종을 규정한 ‘종두규칙’과 인력의 양성을 위한 ‘종두의양성규칙’이 반포되었다. 1897년 종두의양성소가 설립되어 1899년까지 53명의 종두의사가 양성 되어 전국 각지로 종두위원으로 파견되어 활동에 들어갔다.218) 위와 같음. 1900년 이후 전국적으로 매 년 몇 만 명 이상이 종두 접종을 받았으며, 해마다 계속 증가되는 추세를 보였다. 조선의 보건사업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일본조차도 이 시기 종두법에 대해 자신들이 통치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성과를 거둔 부문으로 평가를 내렸다.219) 신동원, 앞의 논문, p.179. 이 시기 지석영은 종두의사의 양성과 종두 행정에서 아무런 임무도 맡지 않았지만 논객 또는 정치가로서 모습을 보였다. 1897년 우두법 실시를 촉구하는 논설을 『독립신문』에 발표하였고, 1903년에는 『황성신문』에 당시의 종두사업을 평가하는 글을 투고하였다.

종두사업이 더욱 강한 행정력으로 정착된 것은 통감부 실시 이후이다. 1908년까지 다소 부진하였던 종두접종 사업이 이 해부터 무료 접종, 강제 접종을 통해서 접종자 수를 대폭 확대하였다. 또 여자 종두접종원을 두어 여아의 접종을 크게 늘렸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접종자가 엄청나게 늘어서 1908년 말 전국적으로 54만 명, 1909년 말 68만 명 접종한 것으로 나타난다.220)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4일자. 이러한 급격한 증가는 무단적인 헌병과 경찰의 동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221) 신동원, 앞의 논문, pp.327∼328. 즉, 종두법이 무단 통치의 수단 중 하나로 활용된 것이다. 이 시기에 지석영의 종두 활동은 거의 없었다. 다만, 1908년 통감부 초기의 종두사업의 부진을 비판하는 글을 썼을 뿐이다.222) 『황성신문』 1908년 3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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