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5 새로운 믿음의 발견과 근대 종교담론의 출현
  • 01. 한국종교사의 흐름과 문화접변의 함의
신광철

특정한 문화권의 종교사(宗敎史)는 다양한 종교들의 만남의 역사이기도 하다. 종교사는 고유한 종교적 요소와 외래적인 종교적 요소간의 접변의 역사이며, 이러한 접변은 특정한 사회의 종교지형(宗敎地形)에 대해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한국의 종교사는 그 어떤 문화권보다도 다양한 종교간 접변으로 채워져 왔다. 한국종교사는 종교문화의 고유소(固有素)와 외래소(外來素)의 다양한 만남의 역사이기도 하다. 종교문화의 고유소와 외래소의 접변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한국종교사의 흐름에는 두 차례의 커다란 문화적인 충격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233) 윤이흠, 「신념유형으로 본 한국종교사」, 『한국종교연구』 권Ⅰ : 종교사관·역사적 연구·정책, 집문당, 1986, pp.33∼41.

첫 번째의 충격은 고대국가 체제가 정비되던 삼국시대에 작용하였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고대국가의 기틀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 고전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삼국은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유교·불교·도교의 고전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3가지 전통은 고대의 기복사상(祈福思想)이 가진 주술적 현세주의와 숙명론의 한계를 지양하여 고전적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부 족연합체로부터 고대국가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이념적 동력을 제공하였다. 동양 고전종교의 영향은 이러한 사회제도적 차원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차원에까지 미쳤다. 불교의 업설(業說)·불국토 사상과 유교의 충효 사상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세계인식과 믿음의 주요한 기저를 이루었다.

확대보기
이차돈 순교비(818년)
이차돈 순교비(818년)
팝업창 닫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동양 고전종교의 수용이 기존의 고유한 종교문화와 심각한 충돌을 빚지 않는 상태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차돈(異次頓)의 ‘죽음’이라는 단편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삼국시대에서의 동양 고전종교의 초기 수용 과정에서 종교문화의 고유소와 외래소 간의 심각한 충돌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실, 이차돈의 죽음 또한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순교(殉敎)’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따르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법흥왕(法興王)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이러한 법흥왕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기 위하여 이차돈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하였던 측면이 강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고대 한국종교사를 살펴볼 때, 유교·불교·도교 등 동양 고전종교는 문화의 한 축을 자연스럽게 형성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는 신교(神敎) 및 무속(巫俗) 전통으로 압축되는 한국의 고유종교와 함께 한국 전통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해 온 셈이다.

동양 고전종교의 수용이 제1의 문화적 충격이었다면, 서양 종교(기독교) 및 근대화의 충격은 제2의 문화적인 충격이었다고 하겠다. 첫 번째의 충격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맥락에서 사회제도적 필요와 상당 부분 맞물리면서 자발적·주체적 수용으로 귀결되었다면, 두 번째의 충격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커다란 충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흔히,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으로 불리는 서양 종교와 서양 문명의 유입은 종교문화와 세계관의 고유소와 외래소 간의 일대 충돌이라는 정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확대보기
제4대 조선대목구장 시뫼옹 베르뇌 주교
제4대 조선대목구장 시뫼옹 베르뇌 주교
팝업창 닫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선발 세력이었던 천주교(Catholic)는 전통적인 종교문화 및 세계관과 심각한 양상의 대립과 갈등을 빚어내었다. 천주교는 ‘교회’ 혹은 ‘집회’를 의미하는 강력한 신앙공동체인 ‘에클레시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유교식 제사 문제 등을 중심으로 전통적 믿음 및 세계관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이러한 충돌은 일종의 파워 게임의 양상으로 확산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형국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만 여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극심한 박해사(迫害史)가 펼쳐졌던 것이다. 인류 역사가 근세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종교적 차이 때문에 이만큼 많은 수의 생명이 위협 받은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인하여, 천주교의 직접적인 포교 활동은 상당 기간 장애를 겪었다. 천주교의 포교 활동금지는 선교사들의 공개적인 활동을 저해하게 되었고, 그러한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상복(喪服)으로 위장하여 사목지(司牧地)를 오가기도 하였다.

한국 그리스도교 선교의 후발 세력인 개신교(Protestant)는 선교 초기부터 선발 그리스도교 세력인 천주교의 역사적인 경험을 교과서 삼아 직접적인 충돌과 박해를 피하려는 선교 정책을 구사하였다. 하지만 전통문화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어 왔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개신교 또한 다양한 맥락에서 기존의 믿음체계 및 세계관과 의 충돌 양상을 빚어냈다.

동양 고전종교의 ‘수용’과 서양 종교의 ‘유입’으로 요약되는 두 차례의 문화적 충격은 한국 종교지형에 대한 일대 구조 변동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믿음 체계의 출현은 그러한 변화에 상응하는 담론의 창출을 자극하는 계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당대의 지성들은 그와 같은 문화적 충격과 종교지형의 변동에 대하여 나름의 해석을 시도한 바 있다. 동양 고전종교 수용으로 비롯된 새로운 믿음체계의 출현에 대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창출한 이가 바로 최치원(崔致遠)이다. 최치원은 동양 고전종교의 수용과 그로 인한 한국종교의 구조 변동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최치원은 우리 고유의 영성(靈性)을 ‘풍류(風流)’로 규정하였다. 최치원은 신라 화랑의 넋을 기리는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 민족 고유의 영성을 규정하였다.

나라에 심오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한다. 교를 설시한 근원은 선사에 자세하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서 여러 백성을 접촉하여 교화시켰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234)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4 眞興王 37년.

최치원은 우리 민족 고유의 영성을 풍류로 보는 한편, 그것이 동양 고전종교의 세 전통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최치원은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적 전통을 풍류도(風流道)로 규정하는 한편, 풍류도가 동양 고전종교의 전통과 합류하여 우리 민족의 영성의 저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최치원은 또한 두 전통의 합류가 가능하였던 까닭을 풍류도의 구조 자체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의 이와 같은 소론은 믿음 체계에 대한 한국적 담론의 중요한 창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의 소론은 한국 종교문화의 고유소와 외래소의 관 계에 대한 담론적 성찰을 구축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라고 하겠다.

한편, 제2의 문화적 충격에 해당되는 서양종교의 유입으로부터 비롯된 한국종교의 구조변동에 대한 담론을 창출한 당대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는 이능화(李能和, 1869∼1943)와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을 꼽을 수 있다.

이하 한국종교사에 나타난 두 번째의 문화적 충격, 즉 서양 종교(그리스도교) 및 근대화의 충격으로부터 비롯된 종교지형의 변동 과정을 서술한다. 이어, 그와 같은 종교지형 변동과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면서 새로운 믿음 체계의 출현에 대한 나름의 담론을 창출하고자 노력한 당대의 대표적 지성들의 종교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먼저 근대 한국사회의 종교지형 변동 양상과 그 사회문화적 함의를 새로운 믿음 체계 출현의 맥락을 중심으로 개관한 후, 그러한 맥락 속에서 당대의 대표적 종교지성인 이능화와 최병헌 개인의 종교적 경험의 자취와 자리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한국종교 연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이능화와 최병헌의 종교관 및 종교 연구의 취지 및 맥락을 분석함으로써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 변동에 대한 당대의 지성들의 담론 체계와 실천의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능화와 최병헌은 한국 종교사학(宗敎史學)의 비조로 손꼽히는 인물이다.235) 유동식, 「탁사 최병헌과 그의 사상」, 『국학기요』 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8, p.147. 하지만 두 사람이 당대의 종교지형 변동을 읽어 내는 인식과 실천의 자리가 반드시 일치하였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학문하는 자리에서 볼 때, 이능화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종교학의 자리에서, 그리고 최병헌은 상대적으로 주관적 흐름을 취하는 신학의 자리에서 당대의 종교지형 변동을 읽어냈던 것이다. ‘한국 종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236) 김종서, 「한말, 일제하 한국종교 연구의 전개」, 『한국사상사 대계』 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p.289. 이능화는 종교들의 경쟁 및 공존이라는 새로운 종교적 상황을 ‘백교회통(百敎會通)’의 관점(비교종교학의 관점)으로 읽어내는 한편, 종교 영역과 사회 영역의 분리 현상에 주목하여 ‘종 교사회사(宗敎社會史)’의 안목을 부각시키려 하였다. 한편 ‘한국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237)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 한국신학사상사 서설』, 전망사, 1984, p.31 ;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대한기독교출판사, p.231. 최병헌은 당대의 종교지형 변동의 과정을 ‘만종일련(萬宗一臠)’의 관점(변증학의 관점)으로 읽어냈으며, 이러한 관점을 그리스도교 토착화의 입론적 근거로 삼았다.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 변동에 대한 이능화와 최병헌의 인식 체계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종교의 역사와 구조를 바라보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인식 체계, 즉 종교학과 신학(또는 敎學)의 인식론적 기초와 실천적 지향을 묻는 작업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또한 종교학적 사유체계와 신학적 사유체계의 특성 및 상보성(相補性)을 물을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작업은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 변동 과정과 그 의미를 당대적 맥락에서 살피는 것을 도움으로써 근대 한국종교문화사를 보다 생생하게 되돌아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