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1권 서구 문화와의 만남
  • 5 새로운 믿음의 발견과 근대 종교담론의 출현
  • 03. 근대 지성의 새로운 믿음 체험의 구조
  • 최병헌의 경우
신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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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사 최병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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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은 유교 지식인 출신으로서 개신교를 수용하고 개신교의 지도자가 된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병헌은 선교사의 어학선생, 성경 및 찬송가의 번역위원, 한국사의 교육적 혁명을 가져다준 것으로 평가되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의 교사, 초기 한국감리교의 주도적인 교회였던 정동제일교회의 목회자, 인천 지방과 서울 지방의 감리사,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지도자, 언론인, 저술가 등 다양한 활동을 보여준 인물이다.

최병헌은 1858년(철종 9년) 1월 16일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241) 탁사의 전기 자료로는 ① 金鎭浩의 「故濯斯崔炳憲先生略歷」, 『신학세계』, 12권 2호, 1927 ② 노블 부인(Mrs. W. A. Noble)이 편집한 「최병헌목사의 략력」, 『승리의 생활』, 基督敎彰文社, 1927 ③ 케이블(E. M. Cable) 선교사가 쓴 Choi Pyung Hun, The Korea Mission Field, 1925 ④ 「Memoir of Choi Pyeng Hun」, 『감리교연회록』, 1927 등이 있다. 이 밖에 탁사 자신의 자서전으로 「自歷一部」(一), 『신학세계』, 12-1, 1927가 남아 있지만, 안타깝게도 탁사의 자서전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미완의 상태에 그쳤다. 탁사의 약력을 정리한 바 있는 김진호(金鎭浩) 목사는 탁사의 유년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先生)의 가정(家庭)이 근본 빈한(貧寒)야 자랄 때에 난의포식(暖衣飽食)을 알지 못고 항상(恒常) 남루(襤褸)한 옷과 열악(劣惡)한 초식(草食)이 그의 생활(生活)이엇고 융동설한(隆冬雪寒)에도 발에 집신을 신고 인동(隣洞)에 내왕(來往)하셧다. 의식(衣食)이 이렇게 간난(艱難)으로 공부(工夫) 에 유의(留意) 가극(暇隙)이 업섯다. 그러나 유시(幼時)브터 천성(天性)이 호기를 됴하야 기한(飢寒)을 아가며 리웃집 서숙(書塾)에 내왕(往來)야 동령(動鈴)글을 호느라고 의게 수치(羞恥)도 만히 당(當)엿스며  모르 눈물도 만히 흘녓다. 이러케 고초(苦楚)를 격거가며 화야만 되겟다 결심(決心)은 조곰도 변(變)치 아니야 침 한학(漢學)을 통(通)셧다.242) 김진호, 「故濯斯崔炳憲先生略歷」, 『신학세계』 12권 2호, 1927, p.99.

위의 기록은 최병헌이 한학(漢學)에 능통한 유교적 지식인에 속하는 인물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최상현(崔相鉉)은 최병헌 1주기에 즈음한 회고 글에서, “션생은 한학쟈이면셔도 동양문화만 고집하지 안으셧고 개국론쟈(開國論者)의 거두이시면셔도 셔양문명에 즁독되지는 안으셧다. 오로지 대의(大義)를 쥬창하야 동셔문화의 쟝뎜을 취하신 것이 션생의 위대한 지개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최병헌이 한학에 정통한 유교적 지식인이면서도 문명개화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243) 최상현, 「追憶濯斯先生」, 『긔독신보』 1928년 5월 9일자. 최상현은 최병헌이 ‘개국론자’, 즉 문명개화론자이면서도 ‘서양문명에 중독되지 않은’ 인물로 평가하였다. 우리는 최상현의 증언을 통해, 최병헌이 개화론의 대세를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최병헌은 전통과 근대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였던가? 그는 척사위정론의 교조주의적인 종교적 배타성을 분명하게 배격하였다. 그는 “이왕에 배우던 유가 서적이 그 사람 마음에 고항 지질이 되어 다른 교회의 서책은 보지 아니하고 이단이라 비방함이니 어찌 큰 병통이 아니리오.”라고 하여,244) 최병헌, 「사람의 병통」,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년 6월 14일자. 척사위정론의 배타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비판이 곧바로 동양의 전통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는 위의 글에 연이어서 “동양의 하늘이 곧 서양의 하늘이오. 서양의 상제께서 곧 동양 상제시니 그 사람들도 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백성으로 아노라.”고 하여, 동과 서를 아우르는 인식론의 단초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최병헌의 인식은 1903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기고한 다음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스스로 개탄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여 실지로 국책을 세우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매양 서양 기계가 이롭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도(道)의 불미(不美)를 물리치고, 매양 외국의 강한 것은 칭찬하면서 왜 그들이 부강해진 원인은 알지 못하니 한스럽다. 대개 대도(大道)는 우리 나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나 외국에나 다 통할 수 있으니, 서양의 하늘은 동양의 하늘이고 천하를 보기를 한 현상으로 보며 사해(四海)는 가히 형제라고 일컫는다.245) 崔炳憲, 「寄書」, 『皇城新聞』 1903년 12월 22일자.

최병헌은 “서양의 하늘은 곧 동양의 하늘(西洋之天卽東洋之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하늘[天]을 매개로 “사해(四海)의 모든 사람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이것이 전통 종교와 서구종교, 곧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한 최병헌의 기본적인 인식틀이었다. 최병헌은 유교를 비롯한 전통종교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교라는 주제의식을 통하여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접목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접목은 최병헌의 믿음 체험을 관통하는 중요 지표가 되었다. 이러한 믿음 체험은 최병헌과 그리스도교의 첫 만남에서부터 구조화된 것이기도 하였다. 최병헌과 그리스도교와의 인연은 1888년 존스(George Heber Jones) 선교사의 어학선생이 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때 최병헌이 맡은 임무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공자, 붓다, 맹자 등 동양의 성현들의 사상과 비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246) E. M. Cable, Choi Pyung Hun, The Korea Mission Field, 1925, p.88. 이러한 경험은 후일 최병헌이 동양종교전통과 기독교의 만남이라는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 기를 이루었다. 최병헌은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의 한문 교사가 되는 등 실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개신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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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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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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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은 선교사들과 함께 일하는 업(業)을 선택하였고 미션 스쿨의 교사로서 활동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동안 서양인들과 그들이 믿는 종교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47) M. W. Noble, 『승리의 생활』, 기독교창문사, 1927, p.15. 하지만 최병헌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방적인 경계심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경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 축적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혀 가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최병헌은 1888년 정동에 있는 양관(洋館)에서 선교사 아펜젤러와 존스를 만나서 한문 신약전서를 입수하여, 그 때부터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한학(漢學)의 방법론을 따라 경전을 연구하듯 성경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유교의 전통적인 학문 체계의 하나인 경학(經學)의 시각으로 서양종교의 경전을 탐구하였던 것이다.

최병헌은 5년 여년에 걸친 성경 연구 끝에 개신교로의 개종을 결심하게 되었고, 결국 1893년에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1893 년 2월에 세례를 받고, 그 해 8월 31일부터 열렸던 감리교 선교연례회에서 권사(exhorter)의 직책을 수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최병헌의 입신(入信)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삶에 있어서 ‘개신교의 수용→서구 근대성의 수용(가)’의 방향성이 아닌 ‘서구 근대성과의 만남→개신교의 수용(나)’의 방향성을 읽어 낼 수 있다. (가)의 경험은 개신교 수용의 결과로서의 서구 근대성 수용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개신교의 절대성이 강조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전통’이 ‘초극(超克)’의 대상으로 간주될 개연성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게 될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나)의 경험은 (가)의 경험보다는 상대적으로 개신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덜 강조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전통’은 단순하게 ‘초극’되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근대성’ 수용의 토대로 다루어지게 될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최병헌의 동양 ‘전통’과 서구 ‘근대’에 대한 인식틀은 양자 간의 ‘대결적 접근(confrontation approach)’을 추구하기보다는 양자간의 ‘접목적 접근(tree grafting approach)’을 지향하는 흐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최병헌의 믿음 체험의 구조는 그의 종교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병헌은 개신교의 절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전통’을 ‘타자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동양종교의 ‘전통’을 토대로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인물이었다. 동양종교의 ‘전통’과 한국사회에 ‘근대-서구’로 다가선 그리스도교를 연결짓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최병헌은 일련의 저작활동을 통하여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협성신학교에서의 강의(한문․비교종교학)를 통해서도 그의 문제의식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문제의식은 정경옥-윤성범으로 이어지는 한국 감리교의 토착화신학의 흐름의 ‘원천’이 되었다.

‘서양의 하늘은 곧 동양의 하늘’이라는 최병헌의 인식틀은 그가 전개한 일련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변증론에 적용되었다. 그는 ‘서양의 하늘은 동양의 하늘’이라는 대전제를 통하여 동양종교 내지는 한국종교의 ‘전통’과 ‘그리스도교’를 관련짓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셩산유람긔」(1907년 『신학월보』에 연재, 1911년 『성산명경(聖山明鏡)』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 「교고략」(1909년 『신학월보』에 연재), 「종교변증설」(1916년부터 1920년까지 『신학세계』에 연재, 1922년 『만종일련(萬宗一臠)』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 등의 저술을 통하여 세계의 제종교와 기독교의 특성을 비교·고찰하였다.248) 신광철, 「탁사 최병헌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변증론」, 『한국기독교와 역사』 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pp.153∼156.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인식을 정동교회의 또 다른 초기 지도자인 노병선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최병헌과 노병선은 김창식, 송기용, 문경호 등과 함께 아펜젤러 목사를 도와 목회에 종사하였던 본처 전도사(Local Preacher)로 일한 바 있는 인물들로서, 정동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세운 인물들이었다. 최병헌과 노병선은 “동양의 하늘이 곧 서양의 하늘”임을 인식하는 데에서 그들의 신학작업을 시작하였다. 노병선은 한국인 최초의 신학논문이라 할 수 있는 『파혹진선론』에서 “모르는 사람은 말하기를, 서양 도이니 동양에서는 쓸데없다 하니 어찌 어리석다 아니리오. 대저 도의 근원은 하늘로부터 난 것이다. 어찌 서양 하늘과 동양 하늘이 다르다 하리오.”라고 하여 동서를 아우르는 사유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249) 노병선, 『파혹진선론』, 대한성교서회,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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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혹진선론
파혹진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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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의 그리스도교 이해는 광범위한 서학 탐구의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개항기 전반기부터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탐독을 통하여 서구문명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으며, 서양의 종교가 서양문명의 뿌리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김진호의 「탁사약력」에 따르면, 탁사는 1880년 한 친구로부터 『영환지략(瀛環志略)』을 구하여 읽게 되면서 ‘태서각국(泰西各國)의 문명(文明)이 기독교(基督敎)가 중심 (中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영환지략』은 당시 『해국도지(海國圖志)』와 함께 서양에 대한 지식을 유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계지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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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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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환지략
영환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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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최병헌은 『만국통감(萬國通鑑)』, 『태서신사(泰西新史)』, 『서정총서(西政叢書)』, 『지리약해(地理略解)』, 『격물탐원(格物探源)』, 『천도소원(天道溯源)』, 『심령학(心靈學)』, 『자서저동(自西沮東)』 등의 서적을 통해서 서양문명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만국통감』, 『태서신사』, 『서정총서』, 『지리략해』는 서양의 지리와 역사, 산업과 문물 등을 소개한 책이었고, 『격물탐원』, 『천도소원』 등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입문서의 성격을 띠는 책이다. 『심령학』은 심리학 입문서이며, 『자서저동』은 윤리에 대한 동서양의 입장을 비교 고찰한 책이었다. 결국 최병헌은 이러한 책들을 통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의 ‘외연’을 넓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문명의 중심에 종교(그리스도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최병헌은 강연 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행한 강연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정교분리(政敎分離)’에 대한 것이었다. 최병헌은 1906년 9월 27일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바 있다. 이 강연은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아 『황성신문』(1906년 10월 4일~6일자)과 『대한매일신보』(1906년 10월 5일~7일, 9일자)에 게재되었다. 최병헌은 청년회의 토론회 연사로 자주 초빙되어 강연을 함으로써 계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행한 강연들은 대체로 ‘문명개화’와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주제는 당시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명의 달성’과 ‘민족 아이덴티티의 유지’라는 이중의 과제에 대한 그 나름의 천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최병헌은 한국의 개 화는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그 기술의 뿌리가 되는 서양의 정신, 즉 그리스도교까지 받아들여야만 참된 개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정치지학(政治之學)과 기예지술(技藝之術)만을 연구하고 불무교도(不務敎道)한다면’ 결코 문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였다. 나아가, 그는 동도서기론의 입장이 “근본에 힘쓰지 않고 말단만을 취하는(不務其本 而取其末)”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였다.250) 崔炳憲, 「宗敎與政治之關係」, 『大韓每日申報』 1906년 10월 9일자 잡보. 결국 최병헌은 문명의 ‘말(末)’이 아니라 문명의 ‘본(本)’인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기(西器)의 수용뿐만 아니라 서도(西道) 수용의 당위성까지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입장은 선별적인 수용형보다는 전면적인 수용형 쪽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화사상이 가지는 독특성은 동도(東道)와 서도(西道)를 단절이 아닌 연속성으로 보고자 하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오늘날 한국 토착화 신학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병헌의 강연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또 다른 면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정치체제의 종류를 군주정체(君主政體), 입헌군주정체(立憲君主政體), 민주정체(民主政體)로 분류하면서, 민주정체를 낳게 한 것은 만민의 평등권을 신봉하는 그리스도교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서 한국의 종교적 쇠퇴와 정치적 타락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그는 이 강연에서 “정치는 반드시 교도로서 그 기초를 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정체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근본이 되는 종교적 도리 곧 교도(敎道)가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편, 최병헌은 이 강연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독특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어찌 감히 교도(敎道)가 정체에 관계가 없다고 하겠는가. 정체와 교도 의 관계가 지극히 친밀하여 마치 차바퀴가 서로 보완함과 같고, 입술과 치아가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과도 같아서 함께 행하여도 서로 어그러져 거슬리지 아니하고 어느 때 어느 시간 아무리 급할 때라도 서로 떠날 수 없느니라.

탁사는 이 강연을 통해서 종교와 정치의 긴밀한 상관성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선교사들이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선교사들은 이른바 ‘정교분리(政敎分離)’ 정책을 내세워 종교와 정치운동의 연결고리를 떼어 내고자 하였다.

‘정교분리담론’은 종교의 ‘근대적’ 속성을 가늠하는 잣대로서 기능하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와 정치라는 구분되고 보편화된 범주 설정은 근대서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251) 장석만, 「19세기말-20세기초 한중일 삼국의 정교분리담론」, 『역사와 현실』, 1990, p.223. 하지만 정교분리담론은 그것이 작동되는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민족적인 아이덴티티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종교와 정치 분리의 당위성만이 강조되는 것은 위기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민족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개연성성이 짙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최병헌은 종교와 정치의 밀접한 상관성을 주장한 것이다.

최병헌의 강연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교도(敎道)는 수신지본(修身之本), 정체(政體)는 치국지본(治國之本)”이라고 하여 ‘종교’와 ‘정치’를 범주적으로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이 두 범주를 ‘구별’하고 있으면서도 마땅히 ‘분리’되어야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던 점에 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면에는 ‘민족 아이덴티티의 위기’라는 상황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연에서 외국인에게 특권이 부여되어 이권이 외국인에게 양도되는 현실을 탄식하고 있다.

최병헌이 종교와 정치의 상관성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그의 종교구국사상이 깔려 있다. 그는 “이 세상은 치명적으로 파선당한 배이니 이 배를 버리고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을 한시 바삐 구조선(교회)으로 옮겨야 된다.”는252) The Answer of the Christian Church to the Problems of Present Day Korea, The Korean Mission Field, 1928, pp.1∼2. 당시 선교사들의 한국교회에 대한 비사회화와 비정치화의 입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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