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화는 개항기 어간부터 비롯된 종교지형 변동의 구조와 의미를 읽어냄으로써,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담론’을 도출해 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늘날, 이능화는 ‘한국 종교학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 이능화가 ‘한국 종교학의 아버지’로 손꼽히는 까닭은 단지 그가 한국종교사 전반에 걸친 방대한 연구 업적을 남긴 때문만은 아니다. 이능화는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 변동의 구조와 의미를 나름의 문법 체계를 가지고 읽어냄으로써, 종교에 대한 과학적 접근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도 한국 종교학의 비조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이능화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종교들의 공존’과 ‘종교 영역과 사회(정치) 영역의 분리 현상’으로 인식하였다. 이능화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 인식을 ‘비교종교학’과 ‘한국 종교(사회)사학’의 틀 속에서 펼쳤다. 이능화의 학문은 비교종교학에서 시작해서 한국종교사학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국종교사회사의 서술을 지향하였다.
이능화의 종교 담론 구축은 당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종교 연구는 그가 살고 있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의 첫 학문적 저작인 『백교회통』은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종교적 상황의 구조에 대한 해명을 지향한 것이었다.258) 李能和, 『百敎會通』, 朝鮮佛敎月報社, 1912.
이능화는 『백교회통』의 서문에서 그의 시대가 처한 종교적 상황 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옛날 인도 땅에 해와 같은 부처님이 한 번 나타나시니 96도의 가르침이 풀잎의 이슬처럼 다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 굵직한 종교가 십수 종에 달하고, 조선인이 스스로 창설한 종교 또한 적지 않으니, 머지않아 각 사람이 한 가지 종교를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때를 맞아서 그 누가 종교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겠는가(昔於印度에 佛日이 一出니 九十六道ㅣ 如草上露야 皆消火矣라. 然今宇內에 屈指之敎ㅣ 有十數種며, 且朝鮮人所創之者도 亦屬不少야 不久에 將見人各一敎라. 當此之時야 誰爲內敎며 誰爲外道리오)?259) 李能和, 「百敎會通序」,『百敎會通』, 朝鮮佛敎月報社, 1912.
이능화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다양한 세계종교(屈指之敎)의 공존으로 파악하는 동시에, ‘조선인소창지자(朝鮮人所創之者)’, 즉 다양한 신종교의 생성에 대해서도 주목한 것이다. 당대의 종교적 지형도에 대한 이능화의 인식은 그 다음 부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러한 당대의 종교적 상황에 직면하여 “무엇이 내교(內敎)이며 무엇을 외도(外道)라고 일컬을 수 있는지”를 반문한 것이다. 여기에서 ‘내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불교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고, ‘외도’는 불법(佛法) 이외의 교법(敎法)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교이며 무엇을 외도라고 일컬을 수 있는지?”라는 물음은 “그 누가 각종교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질문인 셈이다. 이능화에게 있어 그 자신이 믿는 불교와 다른 종교는 서로 차등 없이 공존하는 것으로 자리 매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능화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하나 의 ‘다종교상황(多宗敎狀況, multi-religious situation)’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능화의 종교적 상황 인식은 어떠한 실천적 정초(定礎)로 귀결되었는가? 우리는 『백교회통』의 서문에서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하나의 다종교상황으로 인식한 이능화의 실천적 지향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도가 이미 같지 않은지라. 서로 도모하지 못하니, 누군가에게 맡긴다 해도 다만 각기 자기의 교설을 주장할 뿐이라.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본디 하나의 원으로써 백방을 이루어 나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분별을 지었으니, 물과 우유가 섞이는 것을 기약하기 어렵고 모순만 커질까 염려된다. 이에 모든 종교의 강령을 대조하고 서로 견주어보아서 같음과 다름을 밝게 드러내고, 인용하고 입증하고, 긁어모아서 통하게 하고, 털끝만치라도 뜻을 고칠까 조심하면서 성인들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고, 한글로 토를 달아 끊어 읽음으로써 읽기 편하게 하였으니 각 종교의 이치와 실행이 손바닥을 보듯 환하게 될 것이다. 유교를 믿는 이가 보면, 이것은 유교의 도리이다고 할 것이고, 불교를 믿는 이가 보면, 이것은 불교의 도리이다고 할 것이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심성을 논할 때, 남의 것과 자기 것을 알아서 스스로 판단하고 가릴 수 있게 하며 (하략)(道旣不同이라. 不相爲謨ㅣ니 祇可任他야 各主其說이라. 雖然如是나 元以一圓으로 分成百方이어, 世間之人이 由因不知야 自生分別니 水乳 難期오 矛盾은 是慮라. 爰將諸宗敎之綱領야 對照相竝야 同異發明며, 引而證之야 會而通之며, 毫不變易야 尊重聖訓며, 諺解句讀야 以便閱覽니, 各敎理行이 瞭若指掌이라. 儒者見之면 謂之儒道며, 佛者見之면 謂之佛道며, 他敎之人도 亦復如是야 說心說性에 知彼知己야 自爲決擇며, 下略).260) 위와 같음.
이능화는 이른바 종교 경쟁 시대를 맞아서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의 교설(敎說)을 주장하게 되더라도, 그 주장들은 본시 일원으로 백방(百方)을 이룬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각 종교가 하나의 근본에서 나뉘어졌으며 서로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아보면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각 종교의 주장들을 모아보면 서로 통하는[會而通之] 지점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백교회통』의 구체적인 서술 체계에 있어서 각 종교의 강령(綱領)을 대조상병(對照相竝)하되, 경전의 내용이나 종교사적 사실들을 바꿈(變易) 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종교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고 하는 것은 근대 종교학 출범 이후 종교학의 중요한 지향을 이루어 왔다. 이능화의 비교종교학 작업이 지니는 의의가 여기에 있다.
그의 종교 담론은 백교회통론을 통해서 펼쳐졌다. 그리고 그의 백교회통론은 한국 불교의 회통론(會通論)의 전통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회통론은 불교와 다른 종교, 혹은 불교 전통 안의 서로 다른 사유 체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 구조로서, 불교와 다른 종교, 혹은 불교 전통 안의 서로 다른 사유 체계가 서로 융합될 수 있음을 밝히려 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회통론은 궁극적으로 다름[差異]를 지향한다기보다는 같음[合一]을 추구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게 된다. 이능화는 불교 전통의 회통론을 당대의 종교 공존 및 경쟁 시대에 적용하여 ‘백교회통론’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이능화는 이와 같은 회통론적 이해를 통해 자신의 신앙도 ‘여럿 가운데 하나’일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종교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는 현대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암시하는 매우 개방적인 종교 담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공존 및 경쟁이라고 하는 근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종교적 상황에 대한 이능화의 견해는 그의 후속 작업을 통하여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능화는 근대 한국 종교지형의 얼개를 서술한 논문 「종교(宗敎)와 시세(時勢)」에서 “오늘날과 같은 경쟁시대에 있어서 는 시대의 추이를 관찰해서 제반의 개선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니”라고 하여261) 李能和, 「宗敎와 時勢」, 『惟心』 1호, 惟心社, 1918, p.34, “今日과 如 競爭時代에 在야 時勢를 觀察야 諸般의 改善을 圖치 안이치 못지니.”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종교경쟁시대(宗敎競爭時代)’로 인식하였다. 이능화는 이와 같은 종교경쟁시대의 도래가 동서 문명의 교류 역사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더욱이 이능화는 그와 같은 종교 다원 현상이 동서 문명의 교류 및 대화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논의는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론과 비슷한 논의 구조를 지닌 것이었다.
종교 다원 현상과 함께 근대 종교사의 또 다른 지표(index)를 이루는 것이 종교의 세속화 현상이다. 근대 한국종교사에 있어서도 종교의 세속화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근대 한국 사회에 있어서 종교의 세속화 현상은 종교 영역과 사회(정치) 영역의 분리 현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능화는 이와 같은 종교 영역과 사회(정치) 영역의 분리 현상에 대하여 체계적인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능화의 학문적 관심의 범위는 ‘종교’와 ‘사회’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능화는 한국의 종교사와 사회사의 체계적 정리에 관심을 집중하였던 한국종교(사회)사 연구의 개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종교와 사회라고 하는 그의 학문의 양대 지표는 그가 살았던 당대의 종교지형 변동의 주요한 양상 한 가지와 긴밀히 연관된 것이었다. 이능화는 근대 한국 사회의 종교지형 변동의 주요한 양상 가운데 하나인 종교 영역과 사회(정치) 영역의 분리 현상에 대해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의 학문적 지표인 종교와 사회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선택된 개념이었다.
우리는 당대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종교의 현재적 위상과 미래적 과제를 분석한 이능화의 논문 「종교와 시세」를 통해서 종교와 사회의 관계구조에 대한 이능화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능화는 이 글에서 시세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3대 종교가 대처해 나갈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능화는 이 글에서 유교·불교·그리스도교를 한국의 3대 종교로 손꼽고 있다. 이능화가 유교를 한국의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 꼽은 것은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당시 일제는 불교·그리스도교·신도만을 종교로 인정하는 이른바 ‘공인교정책(公認敎政策)’을 펼치고 있었다. 일제는 유교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교가 지니는 종교사적 위상을 의도적으로 깎아 내리려 하였던 것이다.
이능화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종교 영역과 정치 영역의 분리, 즉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상황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능화가 보기에 당대의 종교에 대한 담론은 이와 같은 정교분리 현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정치가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능화는 많은 사람들이 정교분리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현상이 경학 만능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능화의 이러한 논의는 당시의 종교지형 변동의 추세를 정확히 읽어내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시대의 종교지형은 유교가 종교 영역과 정치 영역을 포괄하면서 세계관을 주도한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종교 영역과 정치 영역은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지 못하고 미분리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 영역과 정치 영역의 이와 같은 미분리 상태는 조선사회의 붕괴와 함께 유교국가 체제가 마감되면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능화는 개항기 이후에 발생한 종교적 상황의 변화에 상응하여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한 학자였다. 무엇보다도 이능화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종교들의 공존’ 및 ‘종교들의 경쟁’과 ‘종교 영역과 사회(정치) 영역의 분 리 현상’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다원현상’과 ‘세속화 현상’이라는 틀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다원현상’과 ‘세속화 현상’은 근대 이후 새로이 조성된 종교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대의 종교지형 변동에 대한 최병헌의 인식에는 그리스도교 중심의 종교관이 반영되었다. 최병헌은 당대의 종교지형을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새로이 재편되어가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지닌 선교적 관심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최병헌이 『만종일련』에서 유·불·선 세 전통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펼친 사실도 이와 같은 맥락 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병헌은 또한 유·불·선 세 전통 가운데에서도 유교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한 바 있다. 유교는 한국사회가 개항으로 비롯된 서구 문명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 순간까지 한국사회의 종교지형을 주도해 온 종교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자면 어떠한 형태로든지 유교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병헌의 궁극적 관심이 비록 한국사회의 그리스도교화에 있었다 하더라도, 개종주의가 주조를 이루던 당대의 선교 상황을 고려할 때, 최병헌의 근대 한국종교사 인식은 오늘날의 자리에서 보아도 여전히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논리는 종교사에 나타난 ‘일(一)과 다(多)’에 대한 지성적 성찰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최병헌의 지성적 인식은 일정한 경계를 전제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만종(萬宗)을 체험 가능하게 하는 일련(一臠)은 바로 그리스도교였던 것이다. 최병헌은 근대 한국종교사에 영향력 있게 등장한 종교적 다원성을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관심의 맥락에서 읽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병헌이 그 자신의 기독교적 관심에 함몰되 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양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주체적인 만남을 시도하였다.
이 점에서, 최병헌은 ‘한국 신학의 선구자’, 특히 ‘한국 토착화 신학의 선구자’로 불릴만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그는 주체적 신학을 모색했으며, 그리스도교를 동양 전통문화에 합류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꿈꾸었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 특히 토착화 신학의 흐름은 과연 최병헌의 이러한 관심사를 올곧게 계승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1960년 이후 전개된 토착화신학은 논자에 따라서 한국의 기층문화인 유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 무속과 그리스도교와의 만남, 불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 증산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 등 한국종교의 개별 전통과의 만남을 모색하는 방향을 취해 왔다. 이와 같은 현실은 토착화 신학의 다양한 전개라고 하는 의의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총체적인 한국 종교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의 종교문화가 지니는 복합성과 중층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현실이 지니는 심각성은 적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능화와 최병헌은 나름의 자리에서 근대 한국종교 변동의 실상과 거기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각자가 처한 맥락 위에서 근대 한국사회의 종교적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나름의 실천적인 정초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능화를 ‘한국 종교학의 아버지’로, 최병헌을 ‘한국(토착화) 신학의 선구자’로 부르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능화와 최병헌은 공히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다종교 상황 혹은 종교경쟁시대로 규정하였다. 최병헌의 학문함의 자리는 신학함의 자리였고, 그 신학함의 자리에서의 지상 과제가 선교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대의 종교적 상황의 또 다른 중요한 지표인 종교 영역과 정치(사회) 영역의 분리 현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주된 학문적 관심은 선교에 있었던 셈이다. 이에 대하여 이능화의 학문적 관심은 상대적으로 한국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기술’에 중요한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이능화와 최병헌의 종교론은 근대 한국의 종교지형 변동에 대하여, 당대에 이미 체계적인 담론을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당대의 종교지형 변동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은 새로운 믿음 체계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며, 새로운 믿은 체계에 대한 두 사람의 이러한 발견은 그들 자신의 믿음 체험과 일정한 연관관계를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이능화와 최병헌의 종교 담론은 오늘날 종교문화를 탐구하는 주요 학문 분야인 종교학과 신학의 근대적 출발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종교 담론은 종교학과 신학의 자생적 출발에 대한 논거로 제시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