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1 토기의 등장과 확산
  • 04. 선사시대 토기 제작기술의 정착과 확산
  • 빗살무늬토기
최종택

지금으로부터 1만년을 전후한 시점에 원시무문토기가 등장한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에서 덧무늬토기와 같은 이른 시기의 토기가 제작되고 사용되었으나 기원전 4,000년경에는 다양한 형태의 빗살무늬토기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유행한다. 이는 한반도에서 토기의 제작과 사용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도구로 찍거나 그어서 만든 점, 선, 원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장식한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토기의 형태는 깊은 바리 모양이 주를 이루며, 바닥은 계란처럼 뾰족한 것과 납작한 것이 있다. 빗살무늬토기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밑이 뾰족하고 빗살무늬가 새겨진 특정 토기만을 지칭하였으나 현재는 원시무문토기와 덧무늬토기 등 신석기시대 초기 토기를 제외한 다양한 형태의 신석기시대 토기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된다.

빗살무늬토기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북방 유라시아의 캄케라믹 (Kammkeramik)을 번역하여 쓴 것이다. 캄케라믹은 빗(kamm, 영어의 comb)과 도기(keramik, 영어의 ceramic)가 합쳐진 말로, 북유럽의 선사시대에 유행한 밑이 뾰족한 깊은 바리 모양의 토기에 빗살로 찍어 무늬를 새긴 토기를 말한다. 일제시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선사시대의 토기가 이와 유사하다고 보아 즐목문토기(櫛目文土器)라고 불렀으며, 이후 일본식 표현을 고쳐 즐문토기(櫛文土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울러 빗살무늬토기는 북유럽의 캄케라믹이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중반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문화의 변화를 전파론적 시각으로 이해하던 단순한 논리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북유럽과 한반도 사이의 넓은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토기가 별로 확인되지 않아 자세한 전파경로를 상정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이 제기되었다. 이후 한반도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빗살무늬토기들이 발굴되고, 빗살무늬토기보다 이른 단계인 덧무늬토기와 아가리무늬토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힘입어 빗살무늬토기가 북유럽에서 전파되었다는 학설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한반도 신석기시대 초기의 토기 제작 전통을 바탕으로 발생한 것으로 본다.

빗살무늬토기는 주로 석영이나 운모가 섞인 사질점토를 바탕흙으로 제작하였으며, 지역에 따라 조갯가루나 석면, 활석, 장석 등을 보강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서리기법이나 테쌓기법으로 성형하였는데, 뾰족 밑 토기는 그릇을 엎어놓은 형태로 아가리부터 만든 후 바닥을 마무리하였으며, 납작 밑 토기는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점토 띠를 쌓아올려 만들었다. 납작 밑 토기의 경우 바닥에 나뭇잎 모양이 찍혀 있는 점으로 보아 토기를 만들 때 편평한 바닥에 나뭇잎 등을 놓고 그 위에서 토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의 표면 에는 뼈나 나무 또는 석재 도구를 사용해 정면하고 문양을 새겼다.

확대보기
빗살무늬토기 각종
빗살무늬토기 각종
팝업창 닫기

아가리 쪽은 빗살과 같이 이빨이 여러 개 달린 도구를 비스듬히 눕혀서 짧은 점줄무늬[点列文]를 새기거나 이빨이 하나인 도구로 짧은 빗금을 연속적으로 새기는 예가 많다. 몸통에는 생선뼈무늬를 가로나 세로 방향으로 새기는데, 이빨이 여러 개인 도구와 하나인 도구가 함께 사용된다. 뾰족한 바닥은 밑을 향하여 짧은 빗금을 방사상으로 새겨 넣었는데, 대체로 뾰족 밑 토기는 엎어놓은 채로 무늬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무늬를 새기는 방법도 다양하여 눌러 긋기와 찌르기, 훑기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되었다.

일부 지역에서 토기를 굽던 시설이 확인되었다는 보고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확실한 형태의 가마 시설은 밝혀진 것이 없다. 청동기시대의 토기 소성 시설 형태와 비교한 실험적 분석 결과를 통해 볼 때,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는 얕은 구덩이를 판 노천요에서 구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탕흙에 대한 암석학적 분석 결과 빗살무늬 토기는 대략 섭씨 700도 안팎의 온도에서 소성되었으며,9) 최몽룡·신숙정, 「한국고고학에 있어서 토기의 과학적 분석에 대한 검토」, 『韓國上古史學報』 1, 1998, p.26. 토기질은 무르고 흡수성이 높다.

확대보기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분포도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분포도
팝업창 닫기

빗살무늬토기는 용량에 따라 소형(평균 4ℓ), 중형(17ℓ), 대형(56ℓ)의 세 종류로 나뉘며, 소형과 중형은 음식물의 준비와 조리, 대형은 저장 기능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0) Im hyojai and Sarah M. Nelson, Implications of the sizes of Comb-pattern Vessels in Han River Site in Korea, Hanguk kogo-hakbo vol. 1, The Korean Archaeological Society, 1976, pp.117∼121. 빗살무늬토기는 화덕에 세워진 채로 출토된 예들이 있어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암사동유적의 경우 빗살무늬토기를 이용해 도토리를 조리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도토리는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그대로 먹을 경우 변비에 걸리는 등 소화하는 데 문제가 있으므로 빗살무늬토기에 담아 물과 함께 끓인 후 탄닌 성분을 우려내 제거한 후 먹었을 것이다. 그밖에 신석기시대의 집터에서는 곡물을 가는 데 사용한 갈판과 갈돌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들 도구를 이용해 준비한 가루음식 역시 토기에 담아 끓여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제작되는데, 크게는 신의주와 영덕을 잇는 선을 경계로 서남쪽은 뾰족 밑 토기, 동북쪽은 납작 밑 토기가 주를 이룬다. 좀 더 자세히 구분해 보면, 동북 지역과 서북 지역, 중서부 지역과 남부 지역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서북 지역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평안북도 일대에 해당하며, 납작 밑 토기가 주를 이룬다. 이른 시기에는 뾰족 밑의 바리 모양 토기도 사용되지만 늦은 시기에는 목이 긴 항아리와 둥근 항아리, 바리, 보시기 등으로 다양해진다. 무늬는 생선뼈무늬와 빗금무늬, 덧무늬 등이 사용된다.

확대보기
동북 지방 출토 빗살무늬토기 각종
동북 지방 출토 빗살무늬토기 각종
팝업창 닫기

동북 지역은 강원도 동해안과 함경남·북도 지방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뾰족 밑 토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납작 밑 바리 모양의 토기가 주로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아가리나 몸통 위쪽에만 짧은 빗금무늬와 생선뼈무늬 등이 새겨 있다. 후기에는 몸통에 평행선을 긋고 그 안쪽에만 무늬를 새긴 특징이 있으며 주로 번개무늬를 많이 새겼고, 이는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중서부 지역은 대동강 유역의 평안남도와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한강 유역의 서울·경기 및 충청남·북도 지방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전형적인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가 유행한다. 토기 표면에는 점줄무늬, 손톱무늬[爪文], 짧은 빗금무늬[短斜線文], 문살무늬[格子文], 생 선뼈무늬[魚骨文] 등 다양한 무늬를 새기는데, 아가리와 몸통, 바닥 등 부위별로 구분하여 무늬를 새기는 것이 특징이다.

확대보기
남부 지방 출토 각종 빗살무늬토기
남부 지방 출토 각종 빗살무늬토기
팝업창 닫기

남부 지역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내륙 지방보다는 해안 지방에 유적이 많이 분포한다. 남부 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며, 이른 시기에는 주로 아가리에만 무늬를 새기다가 점차 몸통 전체에 무늬를 새긴 토기가 유행한다. 늦은 시기가 되면 아가리에 입구가 달린 귀때토기, 붉은 색을 칠한 붉은간토기, 아가리를 두 겹으로 말은 겹아가리토기 등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 6천년 이후에 등장하여 기원전 2,000∼1,500년까지 사용되었는데,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변화한다. 전형적인 중서부 지역의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는 아가리와 몸 통·바닥을 구분하여 각각 서로 다른 종류의 문양을 시문하는 구분문계와 토기 전면에 동일한 문양을 시문하는 동일문계 토기로 구분한다. 두 경우 모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부에서부터 시문 범위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며 변화한다.11) 韓永熙, 「韓半島 中·西部地方의 新石器文化」, 『韓國考古學報』 5, 1978 ; 任孝宰, 「土器의 時代的 變遷過程」, 『韓國史論』 12, 國史編纂委員會, 1983, pp.615∼653.

확대보기
신석기시대 최말기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최말기 빗살무늬토기
팝업창 닫기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하여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문화를 전기(기원전 4,000년 이전)와 중기(기원전 4,000∼3,000년), 후기(기원전 3,000∼1,500년)의 세 시기로 구분한다.12) 임상택, 「중부지역 신석기시대 상대편년을 둘러싼 문제」, 『韓國新石器硏究)』 5, 韓國新石器硏究會), 2003, pp.21∼24. 전기는 전형적인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가 확대되기 이전 단계로 납작 밑 토기가 주를 이루며, 지자문토기·덧무늬토기·아가리무늬토기 등이 함께 유행한다. 중기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가 확산되지만 동북 지역에서는 납작 밑 토기가 여전히 사용된다. 후기는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의 문양이 조잡해지고, 무늬가 없거나 아가 리에만 무늬를 새기는 토기가 증가하며, 동북 지역에는 번개문토기, 남해안 지역에서는 겹아가리토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비슷한 토기는 중국 동북 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도 출토되는데, 동북아시아 지역의 신석기시대 토기와 일정한 관계를 가지며 변화·발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전형적인 뾰족 밑 빗살무늬토기는 일본 죠몬시대의 소바다식토기[曾畑式土器]의 성립에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3) 任孝宰, 앞의 글, 1986.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