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1 토기의 등장과 확산
  • 06. 선사시대 토기와 주민
최종택

신석기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발명된 토기는 기능적인 우수성 때문에 급속히 퍼져 나가게 되었다. 무겁고 깨어지기 쉬운 특성 때문에 제작과 폐기의 순환이 빨라 토기 제작기술은 빠른 속도로 변화되고 발전하였다. 가까운 지역에는 비슷한 토기 제작기술이 공유되기도 하였지만 먼 거리로까지 이동되는 일은 드물었다. 따라서 토기는 공간적으로 제한된 지역에서 독자적인 특징을 공유하며 제작·사용되었다. 때문에 발굴된 토기를 분석하면 당시 사람들과 문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남미의 안데스산맥 일대에서는 5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특정한 양식의 토기가 제작되어 일정한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가 소멸되는 일이 반복된 것으로 밝혀지는데, 이를 통해 문화의 변천 과정을 연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의 변동과 주민의 변화를 토기를 통해 해석하려는 시도가 일찍부터 있었다. 20세기 초 일본인 학자들은 한강 남쪽에는 빗살무늬토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한강 북쪽에는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빗살무늬토기 사용자들은 강가에 살았고, 민무늬토기 사용자들은 내륙의 구릉지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나중에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주민의 산물이고,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특정한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동일한 주민으로 해석하는 경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토기의 등장을 새로운 주민집단이 이주해 온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특정한 토기와 주민집단을 연결시키는 해석은 종족교체설로 이어진다. 과거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주민 교체가 일어난 것은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어 청동기시대의 시작도 역시 새로운 주민의 도래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구체적으로 즐문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시대 주민들은 시베리아 일대에 퍼져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의 한 부류이며,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청동기시대 주민은 중국 동북 지방에 살고 있던 퉁구스족의 일파라는 것이다.

즉, 중국 동북 지방 일대에 살고 있던 퉁구스계 주민들이 고아시아족의 일족인 신석기시대 주민들을 흡수함으로써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는데 나중에 우리 민족의 연원인 예맥족(濊貊族)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설은 한동안 널리 받아들여져 국사 교과서에도 같은 내용이 실렸고, 우리 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신석기시대 주민과 청동기시대 주민이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같은 고아시아족에서 기원한 종족으로 문화나 인종적인 갈등과 대립의 결과로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혼합과 동화의 과정을 겪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고아시아족이라는 종족의 실체가 불분명하고, 종족교체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반론이 제기되었다.25) 이선복, 「신석기·청동기시대 주민교체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韓國古代史論叢』 1, 1991. 또한, 새로운 유적의 발굴조사가 증가되면서 신석기시대 최말기의 토기가 청동기시대 초기의 토기와 유사한 전통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종족교체설은 힘을 잃게 되었다. 특히, 최근 10여 년 사이의 조사를 통해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 가장 오래된 토기이며, 제작기법이나 형태적인 면에서 신석기시대 최말기의 토기와 같은 전통을 기진 것으로 밝혀지면서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는 새로운 종족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빗살무늬토기가 변화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유행하는 덧띠토기는 청동단검과 함께 무덤에서 출토되기도 하지만 집터에서 많이 출토된다. 그런데 덧띠토기가 출토되는 집터들은 나지막한 산언덕이나 구릉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청동기시대 주민들의 마을과는 달리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덧띠토기를 사용하는 주민들의 마을이 높은 곳에 위치하는 까닭은 방어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민무늬토기 주민들과 덧띠토기 주민들 사이에는 갈등과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초기 철기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300년 무렵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해당되며, 잦은 전란을 피해 동쪽으로 이동한 연(燕)나라의 주민들이 철기를 가지고 한반도로 이주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입함에 따라 유이민이 발생하였고 이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들이 덧띠토기를 사용한 주민이며 한동안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주민들과 대립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초기 철기시대 이후 역사기록에는 중국 대륙의 여러 민족들이 한반도를 침입한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의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 하지만 토기에서 보이는 차이만으로 주민의 이동이나 정복 행위를 증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한편, 특정한 토기를 정치세력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청동 기시대의 민무늬토기는 지역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분포하는데, 압록강 하류 일대와 중국 동북 지방의 랴오닝[遼寧] 지역에 분포하는 특징적인 토기를 미송리형토기라고 한다. 평안북도 의주군 미송리유적에서 출토되어 미송리형토기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 토기는 표주박의 한쪽 끝을 잘라놓은 것과 같은 특징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몸통에는 한 쌍의 손잡이를 부착하였고, 몸통 가운데에 구획을 하고 무늬를 새기기도 한다. 미송리형토기가 분포하는 지역은 고조선의 상징적인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분포하는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여 고조선의 토기로 생각되고 있다. 그 밖에 미송리형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서단산유형(西團山類型)의 토기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 일대에 주로 분포하여 이 토기가 분포하는 지역을 초기 부여(夫餘)의 영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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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송리형토기
미송리형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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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는 큐슈 일대에서 시작되는데, 야요이토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토기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죠몬시대에는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는 전통이 전혀 다른 죠몬토기가 사용되었는데, 새로 등장한 야요이토기는 한반도 민무늬토기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야요이토기와 함께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청동기와 고인돌과 독널무덤 등 다른 문화 요소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다.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 결과도 죠몬시대 사람과 야요이시대 사람은 친연관 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때문에 일본 야요이시대의 시작은 한반도에서 온 민무늬토기 사용자들에 의해 전해진 새로운 문화로 해석되고, 그 새로운 주민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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