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1. 기술혁신과 공방의 발전, 원삼국시대
  • 신기술 도입의 역사적 배경
이성주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무문토기(無文土器)는 원료 점토나 성형 및 소성의 기술이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갖추어진 공방에서 숙련된 기술을 익힌 도공이 그릇을 만드는 생산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기 철기시대가 끝나고 원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작기술과 조업방식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원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성형법(成形法)과 가마[窯]의 운영법에 맞게 양질의 점토를 채토해서 사용하였고, 그릇의 성형에 숙련된 타날기법(打捺技法)과 물레질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토기 가마[窯]의 축조와 운영에도 수준 높은 기술이 응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삼국의 고대국가에서는 표준화된 형태로 대량 생산된 회색경질의 도기(陶器)를 볼 수 있게 된다.

원삼국시대에 이루어진 생산기술과 조업방식의 발전은 기술혁신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술혁신이란 갑자기 새로운 어떤 것을 세상에 내놓는 발명과는 달리 이전의 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기 술 요소를 도입하고 응용하는 기간을 거쳐 새로운 기술 체계로 전개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새로운 기술은 생산이나 사용의 경제적 효율을 높여주고 이득을 증대시킨다고 생각하여 어느 사회든지 그런 기술을 목격하게 되면 바로 그것을 채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요즘 연구자들은 그런 단순한 논리로는 발명이나 신기술의 도입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믿고 있다. 간단한 기술혁신의 과정조차 그 이면에는 복잡한 사회적, 혹은 문화적인 요인과 조건,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원삼국시대는 고고학에서 쓰는 시대 구분의 용어인데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약 400년에 해당되는 시대이다.26)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86, pp.128∼130 ; 李熙濬, 「초기 철기시대·원삼국시대 再論」, 『韓國考古學報』 52, 2004, pp.69∼94. 학계의 일부에서는 삼한시대로 부르기도 하고 삼국시대에 포함시켜 삼국시대 전기나 초기로 설정하기도 한다. 이 시대명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은 이 시대를 철기시대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본뜻대로라면 원삼국시대란 삼국이 영역국가로 정립되기 전 원초적 형태의 삼국시대라는 의미일 것이다. 당시 한반도 일대의 정황을 보면 서북 지방에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인 낙랑(樂浪)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고구려와 부여가 일찍부터 성장하여 초기국가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에 비해 한반도 중부 이남은 정치적인 발전이 다소 늦어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으로 구분되는 세 지역에 약 100여 개의 작은 나라가 분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삼국의 원초적인 상태가 형성되기는 하였으나 삼국의 정립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과도기적인 시대인 것이다.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이 원삼국시대 개시기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해당된다. 중국은 전국시대(戰國時代) 혼란기의 종지부를 찍고 진(秦)·한제국(漢帝國)의 시대가 열려 거대 문명국가로서 주변 지역에 정치, 경제, 이념적 영향력을 강력 하게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에 비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비롯한 주변 사회는 이 시기부터 비로써 문명 지역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사회·문화 발전의 동력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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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성 여대시 윤가촌(尹家村)유적 상층(10호무덤)에서 나온 회도분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尹家村)유적 상층(10호무덤)에서 나온 회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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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성 여대시 윤가촌(尹家村)유적 상층(1호무덤)에서 나온 회도옹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尹家村)유적 상층(1호무덤)에서 나온 회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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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에 시작된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의 기원은 전국시대 요동 지방까지 파급된 중원(中原)의 회도(灰陶)기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간 이 신기술이 한반도 지역에 도입되는 과정을 단순 전파론(傳播論)으로 설명해 왔지만 최근에는 기술혁신의 복잡한 과정으로 설명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27) 李盛周, 「原三國時代 土器에 대한 理論的 論議의 方向」, 『先史와 古代』 26, 2007, pp.5∼39. 기술혁신의 과정을 설명하려면 기술의 전파가 이루어지게끔 한 외부적인 요인과 조건도 중요하지만 신기술의 수용이 가능하였던 토착사회 내부의 여건도 생각해야 한다. 토기 생산기술의 혁신을 가능케 한 배경을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첫째, 외부적인 배경으로써 중원문명의 확장에 따라 문명과 주변 사회의 관계가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전국 후기, 전국7웅 중 가장 동북방에 자리 잡고 있던 연(燕)나라가 요동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은 기원전 4∼3세기 전후인데 이때 중원의 철기문화도 이 지역으로 확산되어 들어왔다. 이 철기문화 속 에는 철기 생산기술과 함께 여러 문화 요소들이 포함되는데 그 중에는 회도 제작기술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요동의 철기문화와 한반도의 제 지역사회는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

이후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지금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樂浪)이 한반도 서북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낙랑은 주변 토착세력을 아우르며 정치·사회·문화적 상호작용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낙랑의 설치는 문명의 재확장이란 측면만이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포함한 주변 지역이 문명 지역과의 직접적 상호작용을 통해 정치사회적으로 발전해 나갈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동북아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원삼국시대 초기에 회도 제작의 신기술이 한반도 남부까지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낙랑과 같은 문명의 거점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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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내부 조건으로 한반도 제 지역의 자체적인 사회문화적 변화와 발전의 누적을 고려해야 한다. 한반도와 같은 주변 사회가 중국 문명의 영향으로 사회문화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지만 정체 된 상태에서 일방적인 문화의 전파나 영향을 입어 변화된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성숙한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계급분화가 진행되고 사회 문화적 복잡성이 심화되는 과정을 밟아 왔다.

이러한 사회적인 발전이 새로운 문화 요소와 신기술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쉬운 예로 고온 소성과 정교한 장식을 가진 고급 토기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상위계층이 그러한 기술을 지닌 도공을 생산에 전업하도록 지원해 주었기에 나타날 수 있었다.

물레질법과 같은 익히기 힘든 성형기술이 도공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대량 생산의 기반이 조성된 것도 사회가 복잡하게 되어 토기의 용도가 확장되고 그 수요가 늘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제도(製陶)기술은 사회의 내적인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수용될 수 없었을 것이고 이후 새로운 기술이 발전적으로 적용되는 과정도 사회 변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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