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1. 기술혁신과 공방의 발전, 원삼국시대
  • 토기 제작기술의 발전
  • 소성법
이성주

토기 제작의 마지막 단계에 건조된 토기를 가열하여 화학적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완성품을 만드는 공정이 소성이다. 특별한 시설 없이 토기를 연료와 함께 쌓아놓고 가열하는 원시적인 방법도 있지만 기술이 진보하면 가마[窯] 시설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내부의 온도와 공기흐름을 조절하면서 소성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마 시설은 이 원삼국시대에 도입된다. 원삼국 초기부터 가마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구조가 확인된 가마는 원삼국 말기부터 보이는데 충청북도 진천의 산수리 초기 가마가 대표적이다. 가마 내부의 열기가 움직이는 방향과 평면 형태를 기준으로 가마의 구조는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구조에 따라 소성된 그릇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같은 구조의 가마도 그것을 운영하는 방식이나 사용하는 연료에 따라서 다양한 질의 그릇이 생산될 수 있다.

보통 가마 내부의 온도가 고온으로 장시간 유지되면 경도가 높고 표면이 유리질된 토기를 얻을 수 있는 반면, 저온으로 짧은 시간 소성하면 흡수율이 높고 무른 토기가 만들어진다. 가마의 구조는 가마 내부의 열효율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원시적인 노천요는 900도 이상을 올리기 어려우며, 실요(室窯) 중에서 연소실이 소성실 바로 아래에 있는 승염식요는 1,100도 정도에서 한정된다. 1,200도 이상의 고온소성의 토기를 얻으려면 소성실과 연소실이 평면적으로 배치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28) 李盛周, 「原三國時代 土器의 類型, 系譜, 編年, 生産體系 」, 『韓國古代史論叢』 2, 1991, pp.235∼297. 원삼국시대 말기에 마한 지역에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 가마의 기본 구조가 소성실을 연소실과 나란히 배열하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소성실이 좁은 데다 연료를 위에서 던져 넣도록 되어 있어 아직 고온 소성과 대량 생산에 적합한 가마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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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의 초기 도질토기 요지
함안의 초기 도질토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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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의 초기 도질토기 요지
함안의 초기 도질토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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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원삼국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가마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원삼국시대 초기 가마는 아직 실물로 발견된 것은 보이지 않지만 이 시기 토기를 보면 가마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원삼국시대 초기 와질토기는 고온 소성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제대로 환원 소성된 제품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가마의 구조도 원시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원삼국시대 후기에 접어들면 상당한 고온에서 완전한 환원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름대로의 운영법도 생겨나 그릇의 질과 색상이 다양해졌다. 우리나라 초기 가마는 중국의 반도염식 원요(圓窯)를 받아들여 우리나라의 지형과 여건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29) 顧幼靜, 「韓國 硬質土器의 起源 考察-가마의 구조를 중심으로」, 『湖南考古學報』 32, 2009, pp.37∼70.

대표적인 것이 진천 산수리유적에서 확인된 마한 지역의 원삼국 말기 가마라고 할 수 있는데, 상당히 발전된 가마이긴 하지만 대량 생산과 고온 소성에 적당한 구조는 아니다. 하지만 원삼국시대 전기에 도입된 원시적인 가마가 원삼국시대 말기에는 자연유가 흐를 정도의 도질토기를 대량생산하는 가마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한 소성기술과 가마 구조의 발전에 힘입어 3세기 후반 도질토기가 대량 생산된 곳은 마한보다는 변한 지역이었던 것 같다. 시기는 4세기에 해당되지만 경상남도에서 발굴된 가마는 소성실이 훨씬 커졌을 뿐만 아니라 가마의 전면에서 연료를 투입할 수 있게끔 되어 있는 도질토기 가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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