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1. 기술혁신과 공방의 발전, 원삼국시대
  • 토기의 생산과 사용
이성주

수렵채집의 이동생활을 접고 정착생활이 유지되면서 생업경제도 안정되면 집안에 가재도구들이 늘어나게 된다. 초기 정주(定住)취락의 가재도구로 등장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토기이다. 한 사회에서 사용하는 토기의 종류, 즉 기종(器種)은 토기의 용도에 따른 분화이며 그래서 기종 구성에는 그 사회의 생활상이 반영되어 있다. 물이나 식량을 저장하거나 운반하는 방법, 조리법, 식사법 등이 달라지면 사용되는 기종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그릇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새로운 용도의 그릇도 필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제사를 지낸다거나 무덤에 부장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토기가 제작되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이러한 비실용적인 그릇은 실용토기와 비교해서 외형이나 장식이 특별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마연법으로 그릇 표면을 반들반들하게 한다든지, 문양을 새기거나 채색을 하고, 실용 토기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사물을 형상화한 그릇이 제작되기도 한다. 사회통합의 범위가 넓어지고 계급이 분화되면 상위 계급의 지배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 하고 위신을 높이기 위해 특별한 물품의 생산을 독려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실용적인 물품의 생산이 늘어나게 되는데 토기의 경우도 위신용(威信用), 의례용(儀禮用), 그리고 부장용(副葬用) 토기의 생산이 증가된다.

원삼국시대에 들어서 실생활용 토기의 기종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 마한과 예, 진·변한, 그 어느 지역에서도 원삼국시대 생활용 토기는 무문토기 기종을 그대로 계승한 듯하며 새로 늘어난 기종은 많지 않다. 그러나 분묘에 부장하기 위한 토기의 기종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큰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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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국의 생활용 토기
사로국의 생활용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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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부장된 와질토기
무덤에 부장된 와질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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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배 엘리트의 무덤에 부장용으로 쓰는 토기의 품목 중에는 오리 모양을 한 주전자[鴨形土器]도 있었다.
당시 지배 엘리트의 무덤에 부장용으로 쓰는 토기의 품목 중에는 오리 모양을 한 주전자[鴨形土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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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락이나 패총에서 발견되는 일상용 토기의 종류는 무문토기의 기종에도 있던 대·중·소형의 옹(甕)과 발형토기, 그리고 완(宛) 등이다. 원삼국시대에 새로 추가되는 기종은 대·소형 원저단경호와 시루 등이며 단경호의 사용은 원삼국시대에 들어 매우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일상용 토기의 기종 구성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없어서 예와 마한, 진한, 변한 어느 지역에서도 제작기법은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옹과 발, 그리고 단경호를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분묘 부장용 토기의 기종구성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여준다. 한강 중상류 지역과 영동 지역은 원삼국시대 분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따로 부장용토기가 존재하였는 지도 불분명하다. 마한 지역의 경우 주구토광묘, 분구묘가 축조되면서 여기서 분묘 부장용토기를 볼 수 있다. 중서부 마한 지역의 원삼국시대 후기 분묘에서 발견되는 부장용 토기는 기종 구성이 무척 단순하여 타날문단경호와 발형토기, 2종으로 구성된다.

진한과 변한 지역, 그 중에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원삼국시대 후기에 축조된 지배자 분묘에는 가장 다양한 와질토기 기종이 대량으로 제작되어 부장된다. 이 지역의 원삼국시대 전기 목관묘에는 파수부장경호와 주머니호, 타날문단경호 등이 부장되지만 후기의 목곽묘에는 대부장경호, 노형토기, 단경호, 소옹, 고배, 신선로형토기, 컵형토기, 완, 오리모양토기 등 실로 다양한 와질토기의 기종이 부장품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단경호와 소옹을 제외하면 모든 와질토기 기종은 공이 많이 드는 마연법으로 표면을 다듬었으며 암문(暗文)이라고 하는 은은한 장식적인 효과도 내었다. 마연법으로 다듬는 방식은 시간과 노력이 가장 많이 드는 성형법이고 목곽묘 출토 와질토기 제작에는 전문적이고 숙련된 마연기술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진한 지역의 대형 목곽묘에서 출토되는 후기 와질토기는 목곽묘의 주 인공쯤 되는 지역집단의 수장이 와질토기 전문도공으로 하여금 노동집약적인 기술로 생산하게끔 하였기에 등장한 토기라고 생각된다.

무문토기가 전문인에 의해 일상적으로 생산되어 분배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반대, 즉 한 가구가 필요로 하는 토기를 스스로 제작하거나 기껏해야 한 취락 안에서 필요한 토기들을 특정인이 생산해서 나누어 주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경주 손곡동유적이나 경산 옥산동유적의 발굴에서 파악된 대규모 공방에서 토기생산이 이루어졌다. 즉, 여러 명의 도공이 전업적으로 작업하여 토기를 생산해 내고 상당히 넓은 범위에 분배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삼국시대는 무문토기의 생산방식에서 삼국시대 토기 생산 체계로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단계였다고 여겨진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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