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백제
  • 백제 토기의 형성과 발전
  • 사비시기의 백제 토기
이성주

백제가 도읍을 부여로 옮긴 538년 이후, 백제 토기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 양식에서 커다란 전환을 보게 된다. 사비시기 초기에는 웅진시기의 토기 양상을 어느 정도 이어가지만 6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백제 토기는 성형 및 소성 기술, 외형과 장식, 생산과 분배의 방식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확대보기
부여 관북리 왕궁지에서 출토된 사비시기 회색토기 대표 기종-전달린토기
부여 관북리 왕궁지에서 출토된 사비시기 회색토기 대표 기종-전달린토기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부여 관북리 왕궁지에서 출토된 사비시기 회색토기 대표 기종-유개합
부여 관북리 왕궁지에서 출토된 사비시기 회색토기 대표 기종-유개합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부여 관북리 왕궁지에서 출토된 사비시기 회색토기 대표 기종-대부명
부여 관북리 왕궁지에서 출토된 사비시기 회색토기 대표 기종-대부명
팝업창 닫기

그 변화의 배경에는 고구려 토기의 영향이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47) 金鍾萬, 『백제 토기의 신연구』, 서경문화사, 2007, pp.223∼227 ; 土田純子, 「泗沘樣式土器에서 보이는 高句麗土器의 影響에 대한 검토」, 『韓國考古學報』 72, 2009, pp.118∼159 사비시기의 백제 토기는 주로 충청·전라 지역의 왕궁지, 성지, 사찰, 기타 건물지 및 생활유적, 그리고 토기요지와 고분 등에서 주로 출토된다.

확대보기
회색토기 호자(虎子)
회색토기 호자(虎子)
팝업창 닫기

사비시기 토기의 특징을 그릇 종류별로 보면 먼저 단경호의 경우 이전부터 있었던 둥근 바닥의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가 일부 잔존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납작바닥의 형태의 평저단경호(平底短頸壺)로 변해가는 것이 눈에 띤다. 그리고 전통적인 기종인 직구단경호는 뚜껑이 달린 유개호(有蓋壺)로 변해간다. 웅진시기까지 소형 토기의 주된 기종이었던 고배와 삼족기가 사비시기 초까지 존속하지만 점차 소멸하는 과정을 밟는다. 그 대신 소형 토기로서 새로운 기종들이 나타나는데 목이 짧은 형식과 세장한 형식의 토기병, 접시, 전달린토기, 유개합이 대유행하고 귀족문화의 산물인 호자, 벼루 등이 새로운 종류의 토기로 등장한다.

사비시기에는 생활문화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기종들이 등장하고 널리 사용되는 한편, 중앙 귀족이 사용하는 토기를 중심으로 그 릇의 고급화와 규격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사비 중심지에서 진행되다 중앙과 지방의 관계망을 따라 차별적으로 파급된다.48) 金鍾萬, 「泗沘時代 百濟土器에 나타난 地域差 硏究」, 『科技考古』 7, 2001, pp.81∼144. 웅진시기까지는 백제 토기가 회청색경질 및 회색연질과 적갈색연질로 크게 구분되어 왔으며 태토에 비가소성의 사립이 일정한 양으로 포함되어 있어 다소 거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사비시대에 접어들면 회청색경질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일상 용기의 대부분은 흑색와기와 회색토기로 구분되며,49) 金鍾萬, 『사비시대 백제 토기 연구』, 서경문화사, 2004. 특히 이 두 종류의 토기는 태토에 사립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고운 점토로 제작되었기에 표면이 매끄럽고 고운 질감을 느끼게 한다.

확대보기
청양 왕진리 강변4호가마의 발굴 모습
청양 왕진리 강변4호가마의 발굴 모습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천안 화성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청자양이반구호(靑磁兩耳盤口壺)
천안 화성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청자양이반구호(靑磁兩耳盤口壺)
팝업창 닫기

흑색와기는 사비로 천도한 직후부터 제작되고 회색토기는 7세기에 들어 생산이 시작된다. 이 두 종류의 토기는 제작법에서부터 이 전 시기의 토기와는 차별화된 그릇이었다. 소형의 흑색와기류와 회색토기 병, 완, 접시, 전달린토기 등은 물레에서 뽑아내는 기술로 제작하였으며 6세기 후반경부터는 물레에서 성형된 그릇을 떼어낼 때 실끈으로 바닥을 잘라내는 기법이 도입된다.

특히, 회색토기류 중에는 그릇 몸과 뚜껑이 꼭 맞아야 하는 기종의 경우에 이른바 구절기법(球切技法)이라 하는 상당히 복잡한 성형기법을 적용하여 제작한다. 이러한 표준화된 제품을 효율적으로 대량 생산하기 위해 개발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사비시대에는 토기 소성을 위한 가마 시설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부여 정암리 가마터와 청양 왕진리 가마터와 같은 금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가마는 수·당대 북중국에서 유행하던 이른바 만두요(饅頭窯)와 많이 닮아 있다. 이와 같은 토기 가마는 토기만 굽는 데가 아니라 기와도 함께 소성하였던 와도겸업요(瓦陶兼業窯)로 알려져 있다. 사비시대 왕궁지와 사지 등에서 대량으로 출토되는 토기와 기와를 번조하였던 요지들은 아마 국가권력에 의해 생산과 유통이 조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앙의 국가권력에 의해 생산되었던 토기는 사용 계층이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직접적으로 공급되었던 지역적인 범위도 한정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고급의 칠을 바른 토기와 흑색와기는 역시 도성인 부여를 중심으로 왕궁지와 사찰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을 뚜렷이 보여준다. 중앙의 흑색와기, 회색토기, 칠토기는 지방으로 확산되더라도 익산 지방을 경계로 하여 더 이상 퍼져 나가지는 않는 듯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