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백제
  • 백제 토기와 그 주변
  • 중국 수입 도자와 백제 토기
이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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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수입 자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수입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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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동아시아에서 고온의 유약이 입혀진 자기를 생산하였던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중국의 자기생산은 동한(東漢) 시기부터 시작되지만 서진시기에 생산을 본격화한 절강성의 월요(越窯)가 중국 자기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남조의 자기는 당대 가장 우수한 제품이 었다. 중국 자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수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백제를 제외한 다른 나라는 그 존재가 극히 미미하다. 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수입도자가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는 10여 점 미만인데 비해 백제에서는 수백 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50) 成正鏞, 「百濟와 中國의 貿易陶磁」, 『百濟硏究』 38, 2003, pp.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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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광구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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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3세기 후반경 서진의 전문도기(錢文陶器)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중국산 도자의 수입이 한성백제 꽤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한성백제 시기에 수입된 중국 도자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남조계 청자이며, 최근 흑유계수호(黑釉鷄首壺)라는 특정 기종이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 이 기준은 풍납토성, 몽촌토성 및 석촌동 고분군과 같이 한성백제의 중심지에 위치한 성곽과 고분에 집중되어 출토되지만 홍성의 신금성 토성을 비롯하여 천안의 화성리와 용원리고분, 원주 법천리,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고분 등 지방 고분군에서도 발견된다.

한성백제시기에 이루어진 중국 도자의 수입은 일차적으로 백제 토기의 제작과 사용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수입 도자의 기종과 기형이 한성백제 지배층들의 그릇에 대한 기호를 자극하였고 백제 도공으로 하여금 수입 도자를 모방 제작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탄생한 기종이 견부문양대를 지닌 직구호(直口壺)나 사족반(四足盤), 병(甁), 호자(虎子) 등인데 수입 도자의 이러한 영향은 백제 토기의 기종구성을 다양화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듯하다.51) 權五榮, 「백제의 문물교류 양상에 대한 유형화 시론」, 『대백제국의 국제교류사』, 충남역사문화원, 2008, pp.55∼66. 토기의 제작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보다 더욱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은 위세품의 교환체계에서 수입 도자가 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성백제 이후에도 무령왕릉에 다수의 중국자기가 부장되는 것 을 보면 수입 자기는 당시 백제사회의 지배층에게는 매우 선호되었던 물품이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은 귀중품의 수입은 백제의 중앙 정부에서 독점적으로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중앙 정부가 수입한 도자의 상당량은 지방의 토착세력에게 정치적 의미를 담아 분배되었던 것 같다.

특히, 천안의 용원리고분,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고분군에서 발견된 흑유계수호는 위세품 교환에 이용되었던 대표적인 수입 자기가 아니었던가 한다. 중국 도자의 수입은 한성백제를 지나 웅진시기와 사비시기에도 계속되지만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분배는 점차 제한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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