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신라·가야
  • 신라·가야 토기의 개념
이성주

신라·가야 토기는 시간상으로 삼국시대, 공간상으로는 신라·가야 지역, 즉 지금의 영남 지역에서 생산되고 소비된 토기라고 할 수 있다. 신라와 가야는 엄연히 구분되는 정치세력이었고 신라 토기와 가야 토기 역시 양식적으로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두 토기문화를 구분하여 서술하지 않고 신라·가야 토기로 통칭하여 설명하는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신라 토기나 가야 토기 모두 영남 지방의 공통된 토기 양식, 즉 고식도질토기 양식(古式陶質土器樣式)에서58) 崔鍾圭, 「陶質土器 成立前夜와 展開」, 『韓國考古學報』 12, 1982, pp.213∼243. 출발하여 5세기경에 신라 양식과 가야 양식으로 구분되다가 6세기 중엽 신라의 가야 정복으로 토기 양식도 다시 합쳐지게 된다. 즉, 같은 토기 양식에서 출발하여 한 때 갈라졌지만 다시 신라 토기 양식으로 통합되므로,59) 金元龍, 『新羅土器의 硏究』, 乙酉文化社, 1960, p.5. 하나의 토기 문화 전통으로 이해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신라·가야 토기는 영남 지방의 원삼국토기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원삼국시대 분묘유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와질토기가 출토되며 취락이나 패총 등 생활유적에서는 적갈색연질의 대·중·소형 옹(甕), 시루, 바리[鉢] 등과 회색 연질과 경질의 단경호(短頸壺) 등이 출토 된다.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타날문단경호와 소형원저단경호 등의 단경호 종류가 처음으로 도질토기(陶質土器)로 제작되기 시작한다.

도질토기란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한 석기질(stoneware)에 가까운 토기를 의미하며 표면에 자연유가 흘러내린 경우가 보통이다. 도질토기는 1200도에 가까운 고온 소성의 기술에 의한 토기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실은 물레질과 타날법을 신체로 익힌 도공이 숙련되고 규칙적인 동작으로 표준화된 그릇을 대량 생산하였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60) 李盛周, 「圓底短頸壺의 生産」, 『韓國考古學報』 68, 2008, pp.8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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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고배
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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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파배
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파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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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광구소호
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광구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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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노형토기
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노형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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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소형기대
고식도질토기의 그릇 종류-소형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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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중엽이 되면 적어도 김해와 함안의 고분에서는 도질토기로 제작된 고배, 노형토기, 파배, 광구소호, 소형기대 등 다양한 기종이 출토된다.61) 李盛周, 「加耶土器 生産分配體系」, 『가야 고고학의 새로운 조명』, 혜안, 2003, pp.287∼295. 아울러 종래에 회색연질이나 적갈색연질로 제작 되었던 기종들이 점차 도질토기로 전환되어 가는데,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가 되면 모든 그릇의 종류가 도질토기로 바뀔 뿐만 아니라 도질토기 생산 시스템이 지역적으로도 확산되어 아주 변두리 지역을 제외하고는 신라·가야의 대부분 지역에서 도질토기를 볼 수 있게 된다. 5세기 초쯤 되면 신라와 가야 거의 전 지역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토기가 효율적인 성형기술을 보유한 전문 공방에서 대량 생산되기에 이른다.

4세기 무렵 영남 지방은 여러 세력 집단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중 함안과 김해 지역에서 토기 공방이 가장 먼저 발전하여 다양한 기종의 도질토기를 생산하게 된 셈이다. 이때 도질토기 생산이 발달한 집단에서 미발달한 집단으로 토기 생산기술이 파급되는 현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러한 토기 생산기술의 확산을 통해 4세기 말경에는 너른 지역에 토기 양식이 유사해지게 된다.

그러나 5세기 전반부터 낙동강 이동의 신라가 초기국가로 등장하고 가야에도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등을 중심으로 지역집단들이 뭉쳐 정치세력화하면서 그 안에서만 토기 생산과 분배 및 기술적·양식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결국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변동이 토기 양식의 지역적인 분화를 촉진하여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 동안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의 신라 토기와 서쪽의 가야 토기가 양식적으로 대비되면서 가야의 소국마다 토기 양식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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