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신라·가야
  • 신라·가야 토기의 생산기술
이성주

신라·가야 토기는 도자기 분류상으로 일종의 토기(土器, earthenware)와 석기(炻器, stoneware)의 중간 단계쯤에 속한다. 아주 고온으로 소성된 도질토기는 석기에 가깝지만 나머지는 토기에 속한 다고 할 수 있다. 1차점토를 사용하지 않고 수성퇴적물로 여겨지는 2차점토를 원료로 사용하여 토기 태토에는 순수한 점토만이 아니라 실트성 사질이 포함되어 있고, 불순물이 들어 있어 색깔도 짙다. 이러한 원료 점토는 경상도 지방 저지대의 퇴적층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원료 점토의 가공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형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비가소성 입자를 약간 혼입하거나 유기물과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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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배 물레질 성형흔
고배 물레질 성형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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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토기 성형에는 물레질로 성형하는 방법이 이용되었지만 처음부터 점토 덩이에서 그릇을 뽑아 올리는 방법이 쓰인 것이 아니었다. 점토 띠를 쌓아 대충의 그릇 형태를 빚고 물레질로 다듬는 방법이 주로 적용되었다. 일정 시점부터는 소형 토기의 제작에 물레질로 뽑아내는 성형법이 적용되고 대형 토기는 늦은 시기가 되도 점토 띠를 붙여 올리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원삼국시대부터 물레질은 폭넓게 채용되어 왔는데 단경호의 목이나 그릇 입술을 다듬는 데 주로 적용되었다. 그러다가 점토 띠를 붙여 올린 후 물레질로 그릇의 2/3 이상을 성형하는 방법이 도질토기 단경호 제작에 활용되면서 물레질법은 다른 기종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다.62) 李盛周, 앞의 글, 2008, pp.88∼127. 그러나 점토 덩이에서 그릇을 뽑아내는 물레질 성형법은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가 되어야 등장하며, 그것도 경주 지역의 소형 토기 제작에만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방법이 성공하면서 소형 토기의 대량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 물레질법은 경주를 벗어나 신라·가야 각 지역으로 보급된다.63) 朴天秀, 「三國時代 昌寧地域 集團의 性格硏究」, 『嶺南考古學』 13, 1993, pp.157∼207.

신라·가야 지역에서는 토기를 소성하는 데 밀폐된 가마를 사용하였다. 토기 가마는 바닥이 아궁이로부터 굴뚝까지 경사져 올라가는 이른바 터널형의 등요(登窯)의 구조이며, 이 가마를 운영하는 데 다양한 방법에 적용되어 여러 가지 토기가 함께 생산되었다.64) 李相俊, 「生産考古學의 硏究成果와 課題-三國時代 가마(窯)를 중심으로」, 『고고학의 새로운 지향: 제4회 부산복천박물관 학술대회』, 2000, pp.1∼20 ; 李相俊, 「嶺南地方의 土器窯」, 『도자(陶瓷)고고학을 향하여: 제29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 2003, pp.5∼33. 우선 가마를 개방한 상태에서 소성 시간을 짧게 하여 소성해 낸 것이 적색토기인데 흡수성이 있고 유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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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온 소성으로 인한 자연유
고온 소성으로 인한 자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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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토기는 소성 마지막 단계에 가마의 입구나 굴뚝 및 환기시설을 모두 막아 공기가 차단된 상태에서 마무리한 것이다. 신라·가야의 회색토기는 일반적으로 고온 소성으로 강도가 높아 도질토기(陶質土器)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그릇 종류에 따라, 그리고 시기와 지역에 따라 소성의 조건은 균일하지 않다. 매우 고온으로 소성되어 경도가 높고 표면에 녹색계통의 자연유가 흐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소성 지속 시간이 짧아서 다공질에 무른 회색토기도 있다.

대개 5세기 전반까지 신라 토기는 그릇의 벽이 두텁고 고온 소성의 석기(stoneware)에 가깝지만 5세기 중엽 이후 신라 토기는 불충분한 소성의 회색토기가 대량으로 생산된다. 특히, 고분에 부장하기 위해 대량 생산된 그릇들은 소성 지속 시간이 짧아서 무른 회색토기인데 실용적이지 않은 토기 제작에는 연료와 노동력을 아끼는 생산방식이 도입되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6세기 말 이후, 특히 인화문토기가 출현하면서부터 고배와 같은 소형 기종이 다시 고온 소성품으로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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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적 생산시스템으로 운영된 토기요-경주 손곡동 토기요지 발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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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적 생산시스템으로 운영된 토기요-경주 손곡동 토기요지 21호 토기가마
전업적 생산시스템으로 운영된 토기요-경주 손곡동 토기요지 21호 토기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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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토기의 생산기술, 예를 들어 대량 생산을 위한 성형기술이나 큰 항아리를 생산할 수 있는 대형 가마의 축조 및 운영 기술 등이 실현되려면 숙련된 노동력으로 조직되어 있어야 하고, 상당한 규모의 공방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는 이러한 공방이 언제쯤 등장하는가? 현재의 발굴 자료를 검토해 보면 4세기경 함안과 창녕 지역 토기 가마 유적에서 큰 규모로 조직된 공방을 찾을 수 있다.

창녕의 여초리나 함안의 우거리 토기 가마는 단경호나 대호를 전문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신라·가야 각지에 분배하였던 유적으로 보인다.65) 이정근, 「함안과 창녕지역 토기생산의 특징」, 『天馬考古學論叢』石心鄭永和敎授 停年退任紀念論叢, 2007, pp.229∼262. 4세기에 가야 세력의 거점에서 발전하였던 대규모 공방이 5세기가 되면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의 외곽 여러 지점에도 발생하게 된다.

경주의 손곡동 요지군의 발굴로 5세기부터 대규모로 조업하였던 신라 토기 공방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경주 외곽에는 대규모 토기 가마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신라의 중심지에만 대규모 공방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방에도 여러 곳에 토기 생산 중심지가 있었던 듯한데, 이를 테면 경산 옥산동 가마군 역시 100년 이상 대규모로 조업하였던 공방이었다.66) 金大煥, 「고대 경산지역 정치체의 토기생산과 분배 試論」, 『압독국과의 통신 토기의 메시지』, 영남대학교 박물관, 2006, pp.7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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