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신라·가야
  • 정치세력과 토기 양식
이성주

4세기에는 양식상으로 신라와 가야 토기를 구분하기 어렵다. 이 시기에는 함안과 김해에서만 도질토기의 공방이 번성하였기에 두 지 역 양식을 구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를 중심으로 토기 생산의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아서인지 신라와 가야 토기의 구분은 불가능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초기국가로 발돋움하던 시절이며 신라의 중앙과 신라에 복속된 지방 사이의 관계가 정립되지는 못하였기에 초기국가로서 신라 영토 안에 문화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는 이른바 신라양식 토기도 아직 성립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5세기에 접어들면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가야 세력의 영역이 구분되고 토기 양식군도 그렇게 나누어진다. 물론 토기의 양식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라와 가야를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라와 가야의 정치적인 영역이 시기에 따라 유동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토기의 양상은 생산과 분배와 같은 경제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정치적인 관계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는 정치적인 세력권에 따라 뚜렷하게 토기 양식이 구분되는 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신라는 경주 분지 일대를 영역으로 하는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여 진한(辰韓)의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낙동강 이동 지역 일대에 초기국가를 건설한다. 신라가 주변 소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신라 중심지의 정치·경제·문화적인 영향력이 주변으로 미치게 되는데 토기 양식도 그러한 영향력 중의 일부인 듯하다. 그러므로 신라의 영역 안에서는 신라양식이라고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일정한 정도의 양식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신라양식이라 하여도 각 지방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지역의 토기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경산 지역의 토기를 비교해 보자. 물론 이 두 지역의 토기는 같은 신라양식 토기라고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무언가 다른 특징이 있다. 비단 경산 지역만 그런 것이 아 니고 신라양식의 분포권역에 해당하는 부산, 창령, 김해, 의성, 성주 등지의 토기는 신라양식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경주 일원의 중심지 토기 양식과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신라의 영역 안에서도 경주와 울산, 포항, 영천 등은 신라의 중심 권역이었으므로 중심지 양식, 즉 경주 지역 양식이 분포한다. 그러나 이 중심지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지역의 토기는 같은 신라양식이라도 경주 지역 토기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고 그 지역만의 특색이 일정 기간 전통으로 존속하여 창녕 양식, 의성 양식, 혹은 성주 양식 등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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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토기 지방 양식-창녕 양식
신라 토기 지방 양식-창녕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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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토기 지방 양식-의성 양식
신라 토기 지방 양식-의성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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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토기 지방 양식-성주 양식
신라 토기 지방 양식-성주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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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양상이 나타날까? 이는 당시의 토기생산이 정치사회의 구조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특히,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의 양상을 관찰해 보면, 왜 그런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지 설명하기 쉬워진다. 5세기경 신라는 진한의 소국을 통합하여 초기국가를 실현하였다. 그래서 신라의 영역 안에서는 복속된 소국들이 신라 중심지의 고분문화를 받아들이고 토기 제사법도 모방하면서 같은 양식의 토기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신라양식이 성립하게 된다. 토기뿐만 아니라 묘제나 그 밖의 고 분문화 제 요소에 있어서도 신라의 영역 안에서는 무언가 유사성과 질서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신라 고분문화의 정형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70) 李熙濬, 『신라 고고학 연구』, 사회평론, 2007, pp.66∼75.

그러나 초기국가 신라는 지방을 행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완전한 중앙집권이 실현된 사회는 아니었다. 제 지역의 소국들은 정치·경제적인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으며 토착 지배집단의 존재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각 지방의 지배집단들은 신라 중앙의 고분을 모방하여 커다란 고분을 축조하고 자체적으로 생산된 토기를 부장하였던 것이다. 물론 지방의 도공들이 신라 중앙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여 토기를 생산하였지만 꼭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71) 李盛周, 「新羅·加耶土器樣式의 生成」, 『韓國考古學報』 72, 2009, pp.7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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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양식의 그릇받침과 항아리
대가야 양식의 그릇받침과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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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의 전성기 토기
아라가야의 전성기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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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 양식의 고배
소가야 양식의 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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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가야의 토기 양식이 구분되었던 까닭은 경주에서 신라양식이 나와 낙동강을 경계로 해서 신라의 영역 안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정치세력의 양식이 구분되기 전에는 고식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 양식이라 하여 정치세력에 따라 토기 양식이 구분되지 않았다. 가야 토기는 이 4세기의 고식도질토기의 양식을 많이 계승 하여 조금씩 토기 양식의 변화를 이루어 간 데 비해 신라 양식이란 4세기 말에 돌발적인 변화가 나타나 성립하게 된 것이다.

가야라는 명칭 자체가 김해 지역에 자리 잡은 변한의 소국인 구야국(狗邪國)에서 유래하였듯이 초기의 가야는 낙동강 하구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5세기에 접어들면 낙동강 하구의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내륙에 위치한 고령의 대가야가 대두하게 된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안과 고성에서도 가야의 정치세력이 등장하여 5세기 후반부터는 세 개의 큰 가야 세력이 지역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다가 6세기 중엽 신라의 세력 확장에 병합된다. 가야는 시종 분립된 채,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좁은 범위로 지역집단을 통합하여 연맹체 정도의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고령의 대가야만큼은 상당히 너른 지역에 대가야 연맹체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등 가야의 세 중심세력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토기 양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자의 세력 확장에 따라 이웃한 지역으로 토기 양식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특히, 6세기 초에 고령의 대가야 토기 양식은 정치적인 세력의 확장과 함께 이웃한 합천과 거창, 함양, 산청은 물론이고 소백산맥을 넘어 장수, 남원, 임실 지역까지 확산되었다.72) 郭長根, 『湖南 東部地域 石槨墓 硏究』, 서경문화사, 1999 ; 郭長根, 「湖南 東部地域의 加耶勢力과 그 成長過程」, 『湖南考古學報』 20, 2004, pp.91∼124.

이에 비해 아라가야의 토기 양식은 그리 널리 확산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반면에 소가야의 토기는 고성과 사천을 중심으로 하고 경남해안과 이웃한 광양만 일대까지 확산되어 전성기의 소가야권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6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한 세기가 조금 못 되는 기간 동안 가야 세력의 권역으로 나누어져 특징적인 가야 토기 양식이 분포해 있었다.73) 朴升圭, 「加耶土器의 地域相에 관한 硏究」, 『伽倻文化』 11, 伽耶文化硏究院, 1998, pp.117∼156 ; 朴升圭, 「加耶土器의 轉換期 變動과 樣式構造」, 『伽倻文化』 19, 2006, pp.143∼186.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신라양식과 가야양식으로 크게 구분된 다 하더라도 각 양식 안에서는 지역에 따라 작은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토기를 생산한 도공이 다르고 공방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겠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지역 전통이 되어 100년 이상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도자의 역사에서 좁은 범위에 한정된 지역 양식의 특징이 이와 같이 흥미롭게 나타났던 적이 없었기에 삼국시대 신라·가야의 토기 양식은 아주 흥미로운 연구대상일 수밖에 없다. 신라 양식이건 가야 양식이건 그 안에서 구분되는 소지역 양식은 개별 정치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즉, 신라에 복속한 반독립적인 정치체들이나 가야 세력에 속하는 개별 소국들은 자체적인 수요 때문에 각각 독자적으로 토기 생산 공방을 운영하였던 것이다.74) 김재철, 「경상도의 고대 토기가마 연구」, 『啓明史學』 15, 2006, pp.72∼117.

개별 지역 정치세력 중심지에는 그 지역 지배계급의 고총고분군이 형성되어 있고 그 외 곳곳에 지역집단의 고분군이 분포해 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공방에서는 고분의 토기 제사에 쓰이는 대여섯 종의 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토기 생산을 전업으로 삼았던 초창기 전문 도공은 역사상 처음으로 표준화된 그릇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생산하면서 고정된 제작 행위를 습득하게 되었다.

신라와 가야의 각 공방에서 일하였던 전문 도공들은 신라양식, 혹은 가야양식의 토기를 만들었지만 각자가 몸에 익힌 기계적인 동작은 조금씩 달랐기에 지역 양식의 차이가 난 것이고, 이 동작은 각 공방 안에서 전승되었기에 양식적인 전통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소수의 전문 도공이 한 세대에 걸쳐 토기를 만들다가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그릇 형태에 미세한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삼국시대 신라·가야 토기 양식은 미세한 변화를 분석해 보면, 각 지역에 따라 20년 혹은 30년을 단위로 토기 양식의 변천을 추적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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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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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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