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2. 삼국의 토기생산과 발전
  • 신라·가야
  • 신라·가야 토기의 변천
이성주

신라·가야 토기의 전형적인 그릇 종류, 즉 기종 구성이 완비되는 시점은 5세기 중후반 경이며 이 시점이 신라·가야 토기 양식의 완전한 성립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토기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분을 각 지역 지배계급의 고분군에서 뽑아보면 경주의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분, 부산의 복천동 10·11호분, 함안의 말이산 34호분, 고령의 지산동 32호분, 창녕의 교동 3호분 등에 해당된다.

이 시기가 신라·가야 고분문화의 절정기인 동시에 토기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양식기라고 하여 이 시기를 신라·가야 토기 전성기 또는 중기로 설정한다. 5세기 전반은 신라·가야 토기의 그릇 종류와 종류별 형태가 정해지는 단계에 해당되므로 이 시기를 형성기 혹은 전기쯤으로 편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세기 전반은 토기에 장식도 늘고 그릇의 크기도 축소되어 확실히 전성기의 신라·가야 토기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후기로 편년할 수 있다.

각 지역마다 다양한 지방의 토기 양식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신라·가야 토기의 변천에 전반적인 경향성과 같은 것을 추출하기는 상당 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의 방향은 있다. 우선 신라·가야사회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토기의 생산과 사용의 변화가 고분문화의 전개 과정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고식도질토기 단계로부터 고분부장용 토기의 기종이 갖추어지지만 5세기 전반, 즉 전기까지는 일상생활용과 고분부장용 토기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특히, 신라 지역에서는 작은 고분에도 수십 점의 토기가 부장되므로 고분부장용의 토기가 대량 생산된다. 대량 생산을 하다 보니 성형하기 수월한 원료 점토를 사용하게 되고 따라서 토기 질은 조악하게 된다. 그러나 대량 생산으로 인하여 물레질을 통한 성형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그릇의 형태는 고도로 표준화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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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각고배와 반구장경호
단각고배와 반구장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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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신라·가야 토기의 시간적 변화의 방향이라면 그릇의 크기가 축소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신라·가야 토기의 대표 기종이라 할 수 있는 고배를 예로 들면 5세기 전반에는 그릇의 크기도 클 뿐더러 그릇 두께도 두텁다. 그러나 5세기 후반을 거쳐 6세기 전반에 이르면 그릇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고 기벽도 얇아지게 된 다. 말하자면 그릇이 고분부장용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실용성이 떨어지고 명기화(明器化)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는 셈이다. 그릇의 크기로서 고분의 등급, 혹은 피장자의 위세를 나타내 주었던 그릇받침이나 대부장경호와 같은 기종도 변화의 시점이 조금 늦어질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서 크기가 축소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통형기대와 같이 크기가 큰 토기들은 아예 일찍 소멸되기에 이른다.

전성기의 고배나 대부장경호는 크기도 크고 높은 굽다리를 지녔다. 그러나 축소화의 경향에 따라 6세기 중엽이 되면 굽다리의 높이가 아주 낮아진 단각고배(短脚高杯)로 변화되며 대부장경호도 굽이 낮아지고 아가리에 턱이 한 번 지는 반구장경호(盤口長頸壺)로 변화된다. 신라나 가야 토기 모두 그릇의 크기가 축소되고 점차 명기화되는 경향은 마찬가지인데, 이른바 단각고배와 반구장경호는 가야 토기가 아니라 신라 토기 안에서 발생한다. 이 두 기종을 출현을 기점으로 하여 고신라 토기는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며, 이러한 점을 강조하여 6세기 중엽부터 인화문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신라 토기까지를 신라 후기 양식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75) 崔秉鉉, 『新羅 古墳 硏究』, 一志社, 1992, pp.661∼700.

후기 양식 토기는 신라 진흥왕 때 등장한다. 이 시기는 토기 양식이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로만 볼 수 없으며, 신라 사회와 고분문화의 전체적인 변동이 맞물려 진행되었던 역사적인 변혁기였다. 이 시기가 되면 매장 의례의 관념이 변하여 추가장이 가능한 이른바 횡혈식, 혹은 횡구식 석실분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묘제의 변화와 함께 부장품도 간소화되고 명기화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진흥왕 대는 신라사의 전환기였다. 이때 신라는 영역 확장을 거듭하여 한편으로는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낙동강을 건너 가야로 진격하여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가야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확장된 영토 안에 자치적이었던 토착세 력을 무너뜨리고 중앙의 정치권력이 지방에까지 직접 미치도록 하는 중앙집권을 달성하게 된다. 이러한 중앙집권화와 지방세력의 재편은 고분문화에 커다란 두가지 변동으로 나타난다.

첫째로는 당시까지 토착 수장층의 근거지에 축조되던 고총고분이 거의 일시에 소멸되고 그대신 군사적인 요충지와 같은 곳을 비롯하여 신라 중앙정부와 연결되는 새로운 거점에 고분이 축조된다. 둘째, 신라·가야의 여러 지역에 존속하였던 지방 양식의 토기들이 빠른 속도로 소멸하고 신라 중앙 양식의 토기들이 보급된다. 특히, 새롭게 신라 영토로 편입된 한강 유역과 북부 동해안 지역, 그리고 가야의 고지에도 단각고배와 반구장경호를 대표로 하는 신라 중심지의 후기 양식 토기가 확산되어 들어간다.

신라·가야 토기가 존속하였던 기간 중에 토기의 양식,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의 방식은 정치세력의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변화되어 갔으며 이러한 사실은 한 시대적인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신라·가야 사회에서도 일상생활을 위해 더 많은 토기가 생산되고 소비되었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분에 부장된 토기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삼국시대 이 지역에서는 고분에 부장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토기를 생산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철제 무기나 농공구, 그리고 토기와 같은 중요 물품은 소국 혹은 초기국가의 조정을 받는 전문 공인에 의해 생산되었고 수요와 공급은 정치권력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러한 경제체제하에서 지배층의 고분에 부장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토기를 생산하였다면 그 생산과 분배는 당연히 정치권력의 통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의 종류, 형태, 일정 지역에 일정 기간 존속하였던 양식, 그리고 양식의 분포범위와 시기적인 추이는 당연히 정치세력의 변동과 긴밀히 맞물려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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