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3. 자기발생의 전야, 통일신라시대
  •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과 토기
이성주

통일신라 토기 연구자들은 경주 왕경 주변의 횡혈식 석실분에서 출토된 토기나 화장한 뼈를 묻어주는 골호(骨壺)와 같은 자료를 연구해 왔다. 하지만 이미 삼국시대 후기부터는 중앙집권화로 각지의 고분을 축조하였던 자치적인 지방정권이 몰락하고 여기에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 풍습이 보급되자, 통일신라시대의 고분문화는 빠른 속도로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왕경 일원에서는 그나마 고분군이 존속하지만 지방고분들은 급격히 소멸되고 남아 있더라도 군을 이루어 지속적으로 축조되 는 양상을 살피기란 어렵다. 이 시대에는 고분 부장용 토기는 기종 구성이 단순해질 뿐만 아니라 부장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양상이다. 더욱이 추가장으로 인해 서로 다른 시기의 유물이 섞여 있어 매장유구의 일괄 유물은 같은시기라는 공식이 적용될 수도 없어 토기편년을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횡구, 혹은 횡혈계 석실에서 출토되는 토기자료는 엄밀한 분석을 거쳐 통일신라 이른 시기까지 토기편년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77) 尹相悳, 「6∼7세기 신라 토기의 상대편년」, 『韓國考古學報』 45, 2001, pp.127∼148 ; 洪潽植, 「統一新羅土器의 上限과 下限」, 『嶺南考古學報』 34, 2004, pp.35∼60.

1970년대까지는 통일신라시대 유적의 조사 사례가 얼마 되지 않았고 토기가 출토된 예도 적어서 전체적인 토기문화상을 살피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황룡사지와 안압지의 발굴은 통일신라 토기의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안압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4년(674)에 축조되어 신라의 멸망까지 사용되었던 신라왕궁의 원지(園池)였다. 기록에도 신라 경순왕 때까지 그 사용이 확인되며 고려시대 유물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통일신라 기간 동안의 유물만 주로 매몰되어 있다고 보면 옳다. 그동안 고분 부장용 토기로만 보아왔지만 안압지에서는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용 토기가 다양하게 확인됨으로써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유물군은 통일신라 토기를 전체적으로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78) 國立文化財硏究所, 『雁鴨池』, 1984.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자료는 통일신라 토기의 발생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황룡사와 관련된 역사기록을 뒤져보면 이 가람은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1차 가람이 진흥왕 14년(553)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동왕 27년(566)에 완성되었고 연이어 584년에 금당(金堂)이 조성되고 645년에 9층목탑이 완성되기까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엽까지 축조되었다. 이와 같이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건축물의 기단 구축토에 토기가 묻혀있다면 그 토기는 자신이 제작된 하한연대를 말해주는 것이기에 황룡사지 출토 유물은 통 일신라 토기 발생의 연대를 연구하는데 하나의 기준 자료가 된다.79) 崔秉鉉, 『新羅古墳硏究』, 一志社, 1992, pp.6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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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진죽리 요지 출토 주름무늬병
보령 진죽리 요지 출토 주름무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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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구룡리 출토 녹유병
당진 구룡리 출토 녹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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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중국의 도성을 모방하여 조방제(條坊制), 즉 건물과 도로를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시키는 일종의 계획도시를 경주에 건설하기 시작하는 것은 늦어도 5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80) 朴方龍, 『新羅 都城 硏究』,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申昌秀, 「新羅의 王京」, 『강좌 한국고대사』 7,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p.165∼212. 이후 6세기 중반이 되면 도시의 체제가 정비되고 왕경이 북천을 건너 용강동과 동천동 일대까지 왕경이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동안 이 도시유적의 조사와 보존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 경주 시가지 곳곳에서 도시유적의 발굴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신라의 조방(條坊)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그간 발굴되지 않았던 통일신라의 도시유적이 구제 발굴로 모습을 드러내자 그에 따라 당시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지방에서는 행정치소였던 성곽과 건물지의 조사에서도 통일신라 토기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특히, 신문왕 5년(685) 정비된 9주5소경 의 거점에 자리 잡은 성곽과 취락에서 통일신라시대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삭주(朔州)와 사벌주(沙伐州)가 설치되었던 강원도 춘천과 경상북도 상주 등지에서는 수혈주거지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 마을유적에서 당시의 일반인들의 생활용 토기가 확인되고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 보령의 성주사지 등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 번성하였던 지방의 사찰유적 역시 당시의 생활문화와 함께 토기의 양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통일신라 말기에 조업을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가마터유적으로 영암 구림리 요지와 보령 진죽리 요지가 발굴되어 여기서 나오는 유물은 이 시기 토기생산기술과 청자 발생으로 이어지는 기술적인 발전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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