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2 토기 제작전통의 형성과 발전
  • 03. 자기발생의 전야, 통일신라시대
  • 인화문토기와 시유도기
이성주

과거 일제시대 고고학자들은 경주 충효동 고분군을 발굴하고 나서 묘제가 횡혈식석실이란 점과 출토되는 토기들이 인화문토기(印花紋土器)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당시까지 알려진 고신라의 묘제는 적석목곽분이고 거기서 출토되는 토기는 인화문이 없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묘제인 석실분과 거기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는 통일신라문화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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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충효동10호 석실분 구조
경주 충효동10호 석실분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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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유로 한동안 인화문토기라 하면 바로 통일신라 토기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물론 인화문토기가 이른 시기 통일신라 토기를 대표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출현 시기를 삼국통일 이후로 볼 수는 없다. 6∼7세기대 고분군 조사자료가 늘어나고, 특히 황룡사지의 발굴을 통해 삼국통일 이전 시기의 문화층에서 인화문토기가 출토되어 아무리 늦게 보아도 7세기 초쯤이면 인화문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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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충효동10호 석실분 출토 인화문유개합과 고배
경주 충효동10호 석실분 출토 인화문유개합과 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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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문이라는 새로운 시문기법의 등장도 중요하지만 토기 양식, 제작기술, 생산과 사용의 차원에서 무언가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시점은 6세기 중반 경이라 할 수 있다. 이후부터 진행되는 신라 토기의 변화는 한마디로 통일신라 토기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세기 중반 이후까지 고신라의 그릇 종류나 종류별 모양새는 어느 정도 지속된다. 물론 고신라 토기 주요기종인 고배와 대부장경호, 장경호, 유대완 등이 6세기 중반 이후에도 존속하지만 그 크기는 이전에 비해 훨씬 축소되었고 그 형태는 더욱 표준화, 규격화되어갔다. 그릇이 낮고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이전의 기하학적인 새김무늬는 그릇표면에 넣을 만한 자리가 마땅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고배의 뚜껑과 장경호의 어깨와 목을 장식하던 새김무늬의 문양단위가 점점 축소되어 아주 작은 반원문(半圓文)과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으로 된다. 이와 같이 소형화된 문양 단위로 변화되어 가자 마침내는 이를 그어내는 것이 아니라 찍어낸 무늬로 바뀐 것이 인화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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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안압지 출토 각종 인화문 토기류
경주 안압지 출토 각종 인화문 토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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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문 녹유완
인화문 녹유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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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말, 혹은 7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최초로 모습을 보이는 인화문은 처음에는 새김무늬와 함께 시문되었고 원형의 문양 요소를 하나하나 찍는데서 출발하였다. 즉, 최초의 인화문이란 것은 종래에 컴파스로 돌린 원문 혹은 반원문를 대신하여 낱개로 그 무늬를 찍는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 원문류들은 보통 길쭉한 삼각집선문과 같은 새김무늬와 결합되는 것이 보통이며 시문의 부위나 면적도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 점차적으로 인화문은 종류 도 다양화되고 그릇표면 찍는 면적도 확대되어 간다. 원문, 반원문, 이중반원문, 열점문, 화편문, 화승문, 연주문, 운학문, 영락문 등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가 전성기를 맞으면서 인화문의 종류가 크게 늘어난다. 그와 함께 시문부위가 그릇 전면으로 확대되는 것이 많아지고 유개합이나 그 뚜껑, 골호 등에서는 그릇 전면에 인화문이 찍힌다. 이어 초기에 문양 요소 하나하나를 낱개로 찍었던 방식에서 벗어나 시문도구가 발달하게 되면 문양요소 여러 개가 종이나 횡으로 연속되어 하나의 시문단위를 구성하는 연속반원문, 연속마제형문(連續馬蹄形文), 열점문과 같은 시문구를 사용하여 찍는 방법으로 발전한다. 인화문의 도입은 화려한 장식효과란 측면에서 이해 할 수도 있지만 규격화되고 고급화된 문양효과를 얻을 수 있고 시문시간을 축소하는 기술적 효율성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소성기술이나 태토의 질에서 통일신라는 아직 자기(磁器)의 시대가 아니라 도기(陶器)의 시대였다. 그런데 종종 도기질의 태토에 녹색 혹은 황갈색의 저온유약을 입혀 만들어진 시유도기(施釉陶器)가 발견된다. 이러한 시유도기는 삼국시대 신라에서 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서 먼저 중국의 한대(漢代) 혹은 그 이후의 청자나 시유도기의 기술을 모방하여 생산되었던 것 같다. 물론 신라에도 삼국통일 이전에 선진 중국의 자기나 고구려, 백제의 시유도기류가 수입되어 있어 유약 사용에 대해서는 충분한 계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미 4세기 후반경에 속하는 경주 월성로 가-5호 고분에서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되는 황갈색 시유도기가 발견된 바 있다. 백제는 일찍부터 다량의 중국 자기와 시유도기가 수입되었던 지역이고, 그릇을 고급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비시대에 이르러서는 흑색와기와 칠 바른 토기와 함께 적어도 6세기 중반 경에는 녹유도기(綠釉陶器)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81) 李鍾玟, 「百濟時代 輸入陶瓷의 影響과 陶磁史的 意義」, 『百濟硏究』 27, 1997, pp.53∼80.

시유도기란 900도 이하의 온도에서 태토가 완전히 유리질화 되 지 않은 조건에서도 유약이 녹아 그릇 표면을 덮은 도기를 말한다. 자기는 가마 안의 온도를 높이는 기술도 문제지만 고온에서도 녹지 않고 견디는 점토를 이용해야만 한다. 시유도기는 자기와는 달라서 그러한 기술적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도 화려한 질감의 그릇을 얻을 수 있었다. 통일신라의 시유도기는 백제의 녹유도기 제작 전통을 계승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82) 金英媛, 「統一新羅時代 鉛釉의 發達과 磁器의 出現」, 『美術資料』 62, 1999, pp.1∼25. 적어도 7세기 초 정도가 되면 신라에서도 시유도기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역의 고분 발굴품으로 7세기 전반의 연대를 보이는 것은 김해 예안리 17호, 합천 저포리 E지구 2호묘 출토품이 있다. 통일신라의 시유도기는 녹색계통의 녹유와 갈색을 띄는 갈유, 그리고 당삼채를 모방하여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는 신라삼채(新羅三彩)가 있는데 그 중 녹유계통이 가장 흔하게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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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채 골호
신라 삼채 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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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기에 접어들면서 시유도기는 다양하게 발전한다. 우선 통일신라의 귀족들이 장골용기로서 화려한 시유도기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국보 제125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화문 녹유합(綠釉盒)과 경주 남산동 출토 녹유사이호(綠釉四耳壺),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각고배 형식을 한 신라삼채골호(新羅三彩骨壺)와 같은 정교하고 장식이 뛰어난 제품이 제작되었다. 녹유도기는 통일신라시대 귀족적인 생활이 추구되면서 일상용기를 고급화하려는 욕구로 발 전된 물품이었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녹유발(綠釉鉢)과 같은 화려한 유물이 있으며 전라남도 출토품이라고 전하는 녹유인화문병(綠釉印花文甁)은 매우 뛰어난 물레질 솜씨로 제작된 대부병이다. 이 병과 거의 같은 형식이 충남 당진 구룡리 요지에 출토되고 있는데, 통일신라 말기의 매우 발달된 녹유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유기법은 사찰 건축물의 와전류(瓦塼類) 제작에도 적용되어 매우 화려한 장식성을 자랑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사천왕상전(綠釉四天王像塼), 안압지에서 출토된 녹유귀면와(綠釉鬼面瓦)와 녹유연화문와당 등을 들 수 있다.

경주 주변의 인화문토기 가마터에서는 시유도기의 파편이 종종 발견되고 있으며 인화문토기 중에는 이른 형식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때문에 통일신라기 초기부터 왕경를 중심으로 한 생산유적에서 시유도기의 생산이 증가되었던 것 같다. 통일신라 늦은 시기부터는 당진 구룡리요지, 보령 진죽리요지 그리고 영암 구림리요지와 같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가마터에서도 일정량의 시유도기가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단계에 이르면 지방의 가마터에도 시유도기가 활발히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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