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1. 차 문화의 유행과 청자의 제작
  • 청자는 언제 어떻게 만들었나
이종민

한국의 청자는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낸 자기질(磁器質) 그릇이다. 자기란 고운 태토(점토)로 기물을 만들어 유약을 바른 후 높은 온도에서 구워 완성해 낸 그릇을 말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청자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도기(陶器)에서 자기로’ 도자 생산의 중심이 옮겨가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자 제작의 성공은 부가가치가 높은 신소재의 도자 생산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영위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면 과연 한반도의 청자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한국 청자의 출현 시기를 알기 위하여 이해가 필요한 부분은 고려시대 이전의 차 문화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차는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부터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흥덕왕 3년(828)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얻어오자 왕이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고 전한다.85)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 興德王 3년조. 이를 보면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가 음용되고 있었고 9세기 이후 부터는 차를 직접 재배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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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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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당 문화의 접촉 속에서 중국의 차는 물론 차를 마시기 위한 도자용기가 수입되어 널리 이용되었다. 수입이 이루어진 중국제 찻그릇은 주로 자기로 제작된 다완(茶碗), 다호(茶壺)로서 중국의 형요(邢窯) 백자와 월주요(越州窯) 청자, 장사요(長沙窯)의 청자가 애용되었다.86) 李鍾玟, 『韓國의 初期靑磁 硏究』,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12, pp.25∼28 ; 김영원, 「한반도출토 중국도자」, 『우리 문화속의 中國陶磁器』, 국립대구박물관, 2004, pp.140∼143. 이러한 중국산 자기들은 8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대외무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점차 한반도로 유입되었으며, 수입된 시기는 주로 9세기였다. 국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중국 자기들은 당시 대도시였던 경주 지역과 호족세력들의 근거지였던 지방의 중소도시, 혹은 대형 사찰이나 성(城)과 같은 방어시설에서 발견된다. 이는 차를 음용하는 계층이 어떠한 부류였는지를 추측하는 데 도움을 준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반 사이, 한반도는 후삼국시대에 돌입하면서, 특히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선(戰線)이 형성되었다. 불분명한 경계 사이의 고을을 영토권 안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던 치열한 전쟁은 중국과의 교류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자리 잡았다. 마침 중국도 907년부터 960년경까지 오대(五代) 10국(十國)이 난립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중국 도자의 안정적인 국내 공급은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중국 차도구의 국내 소비는 자연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차는 고려 국초부터 국왕의 하사품이나 국가의 공식적인 대소사에 필수적인 의식절차에서 활용되어 그 수요가 줄지 않았으며 이에 필요한 각종 차 도구가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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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완
백자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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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되어 가는 차 소비와는 다르게 정치·외교관계의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중국산 수입도자의 부족은 자기를 생산하지 못하던 고려 입장에서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10세기대에 제작된 중국 도자는 한반도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자기제 차도구를 직접 제작해야 하였을 것이다.87) 李鍾玟, 「韓半島初期靑磁の分類と編年」, 『東洋陶磁』 34, 東洋陶磁學會, 2004∼2005, pp.87∼113.

한국에서 청자가 처음 만들어진 시점은 시각 차이가 있으나 대략 고려 초인 10세기 전반 경부터였다. 수도 개경(開京)은 고려 초에 들어와 상주인구가 증가하고 권력이 집중되면서 최대의 자기 소비시장이 되었다.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 사례들은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충남 일부 지역에 퍼져 있는 고려 초의 가마터 자료에서 확인된다.

중서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가마터 유적중 경기도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여주 중암리, 황해도 배천 원산리의 가마는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 초부터 청자가 제작된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의 가마들은 약 총 길이 40m 내외에 벽돌을 주 재료로 축조한 대형 규모의 이른바 전축요(塼築窯)이다. 같은 양상을 보이는 가마 구조는 중국 절강성의 월주요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어 한반도의 전축요들이 중국 남방계 가마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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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청자가마터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청자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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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가마터에서는 차를 마시기 위한 사발인 다완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도 주자, 꽃 형태의 접시(화형접시), 기타 접시류, 잔, 잔받침, 소형 항아리, 장고, 제기편 등이 포함되어 있으나 차와 관련된 품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청자를 생산한 주 목적이 차도구 확보였음을 알려준다. 유물 중에는 글자가 음각되었거나 연대 추정이 가능한 사례가 포함되어 있어 한반도의 청자 발생 시기를 추측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의 2호 가마터의 최상부에서 발견된 청자고배를 주목할 만하다. 이 고배의 굽바닥에는 원형으로 글자를 돌려 명문을 음각하였는데 내용은 ‘순화3년임진태묘제사실향기장왕공탁조(淳化三年壬辰太廟第四室享器匠王公仛造)’라고 씌어 있다. 이를 해석해 보면 ‘순화(송 태종의 연호) 3년인 992년, 태묘에서 광종을 모시는 네 번째 방에 (이 그릇을 넣기 위해) 제기 만드 는 장인인 왕공탁이 만들었다.’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도 한 해 뒤인 993년에 태조의 제실에 넣기 위한 만든 제기항아리가 전해지고 있어 제작 성격이 같은 이 두 유물은 함께 배천 원산리에서 만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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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3년’명 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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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3년명고배 밑부분
순화3년명고배 밑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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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무엇을 위해,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을 가진 이 유물의 존재는 고려시대 초기의 청자 제작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이들 명문 자료들은 배천 원산리의 가마터 발굴조사 때에 가마바닥의 최상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가마바닥의 최상부는 마지막 폐요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배천 원산리 2호 가마는 명문 있는 제기들을 포함한 청자를 구운 후 곧 요업을 중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마 바닥의 두께가 1m에 가까운 점을 고려한다면 원산리 2호 가마는 더 이른 시기부터 청자를 구워내었던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된 가마가 중서부 지역에는 여러 곳에 있다는 점이다. 가마의 구조나 생산품의 조형 등에서 시흥 방산동의 방산대요(芳山大窯) 발굴조사는 유사한 가마가 다른 지역에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88) 海剛陶磁美術館·京畿道 始興市, 『芳山大窯-始興市 芳山洞 初期靑磁·白磁 窯址 發掘調査 報告書』, 2001. 발굴 지역들을 중심으로 중서부 지역에 퍼져 있는 이들 전축요들은 지표조사 결과 운영시기 등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축요들의 폐요 과정이 모든 가마들간에 유사하여 같은 시기에 전축요들이 폐기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배천 원산리 2호의 명문제기들은 원산리 가마유적을 포함하여 유사한 성향을 갖는 다른 전축요들의 폐요 시점을 추측하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청자의 개시 시점은 10세기 후반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전축요들은 10세기 말경, 혹은 11세기 초반경의 어느 때인가 사라져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고려의 3대왕 정종(定宗, 재위 945∼949)의 안릉(安陵)에서 출토된 청자화형발, 청자화형대접, 청자잔탁, 청자주자뚜껑 등은 949년 정종이 승하하였을 때 무덤에 부장된 유물이었다.89)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12, 1992. 이와 똑같은 형태를 지닌 청자들은 중서부 지역의 전축요에서 파편으로 발견되고 있어 안릉의 부장용 청자들을 토대로 제작 시기를 판단하면 고려에서의 청자제작은 적어도 10세기 전반부터 가능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고려청자의 최초 제작 집단은 중국인 도공이었다. 가마의 축조기술이나 축조재료, 세부적인 구조물, 생산된 도자의 종류와 형태는 10세기 전반경인 중국 오대 시기의 월주요 장인들이 구사하였던 기술과 동일하다. 그러나 처음 고려에 이주하여 청자기술을 전해준 중국 장인 집단의 영향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고려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한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반경 사이, 중앙정부의 행정력은 한반도의 끝자락까지 미쳤으며 전라남도 강진을 위시한 전라남도의 서남해안 지역으로 요업 중심이 이동하면서 고려 도공에 의한 청자 제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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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화형발
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화형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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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잔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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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잔탁
안릉 출토 청자 일괄품-청자잔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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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해안 지역은 지하에 굴을 파고 도기를 굽던 요업의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청자 제작은 전통적인 도기가마를 지상으로 끌어올리고 자기가마의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소형의 토축요(진흙으로 축조한 가마)를 운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제작품들은 도기를 만들던 장인 집단이 청자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전축요 생산품 스타일의 중국식 청자 형태와 전통적인 도기식 청자 형태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90) 李鍾玟, 「南部地域 初期靑磁의 系統과 特徵」, 『미술사연구』 16, 2002, pp.199∼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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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용운리 10-4호 가마구조
강진 용운리 10-4호 가마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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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지역의 가마들에서는 10세기대에 만들어진 청자와는 변화된 형태의 그릇들이 생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면서 유색이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기술이란 초벌을 말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특히 강진 지역의 청자들은 유약층이 두꺼워지고 유색(釉色)이 진초록 빛을 띠기 시작하였다. 초벌 과정이 적용되면서 고려청자는 색조에서 중국청자와 차별화된 느낌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만들어진 품목의 핵심은 차용기인 다완과 여러 종류의 관련품들이었다. 이들 중 생산 수량이 가장 많은 다완은 넓은 굽지름과 접지면, 그리고 내면에 낮게 깎은 원지름(내저원각)을 갖고 있어 중국의 다완과는 차이를 보이는데 사람들은 이를 흔히 해무리굽완[日暈底碗]이라고 부른다.

11세기대에 서남해안 지역에는 강진을 위시하여 그 주변 지역인 해남, 고흥, 장흥 등지에서도 청자 생산이 이루어졌다. 수요층이 확산되면서 생산된 청자의 품질은 다양하였으며 발달하기 시작한 운송 루트를 따라 이 시점의 청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소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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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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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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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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