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2. 고려의 색, 청자의 빛
  • 새로운 기술과 조형의 수용
이종민

“푸른빛은 쪽빛에서 나왔으나 쪽빛보다 더 진하다.” 『순자(荀子)』의 「권학(勸學)」 편에 등장하는 이 말은 고려청자의 우수성과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하는 용어이다. 고려청자의 발생은 분명 중국 오대 월주요의 기술을 습득한 것이 틀림없으나 고려청자는 어느 순간 중국청자를 넘어서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려청자의 우수성은 크게 비색(翡色)의 구현과 세련된 조형을 발전시켜간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청자의 색조가 유달리 푸른빛을 발한 것은 초벌을 하고 소형가마에서 노련하게 불 조절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청자 발생기인 10세기경, 중국으로부터 국내에 전해진 청자기술 속에는 태토의 선별, 성형방식, 각종 도구, 시유기술, 가마쌓기 등 모든 일련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증거는 전축요의 발굴 조사 결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전축요에는 자기를 구울 때 초벌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폐기된 결과물인 초벌 파편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즉, 전축요에서는 초벌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초벌은 성형한 후 건조된 기물을 700∼800도에서 구워내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때 미리 파손품을 확인하여 걸러 내고 유약통에 담가두는 시간을 조절함으로써 유약의 두께를 달리 입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청자 제작 초창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품이 가마터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은 초벌 과정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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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완 파편 및 초벌구이 파편
청자완 파편 및 초벌구이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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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10세기경의 중국 가마에서는 초벌을 하지 않고 성형된 기물에 유약을 씌워 한 번에 구워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국내에 전해진 번조기술은 바로 이렇게 한 번의 과정을 통해 자기를 완전히 굽는 단벌 번조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유약을 입힐 때 기물을 오랫동안 유약통 속에 담가두면 그릇이 녹아버리므로 시유 과정은 빨리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나라 중서부 지역 전축요에서는 얇은 유약층을 가진 자기들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형 가마들은 불조절이 용이하지 못하고 환원이 쉽게 걸리지 않아 청자의 색조는 올리브그린(olive green)색을 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1세기에 요업의 중심이 서남부 해안 지역으로 옮겨진 이후 강진 지역에서는 초벌기술이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강진 용운리, 삼흥리 일대의 발굴조사에서는 해무리굽완을 비롯하여 각종 그릇 파편에 초벌편이 섞여 있어 이 과정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고려청자는 유약의 두께가 두꺼워졌으며 진초록빛을 띠는 고려비색(高麗翡色)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10m 내외의 작은 소형 토축요를 사용한 강진에서 양질의 청자가 생산된 것은 이 가마가 불 조절이 용이하고 환원이 잘 걸리는 시설이었음을 말해준다. 옥빛에 가까운 고려청자의 제작은 이렇듯 초벌기술의 활용과 불 조절이 쉬운 소형 가마를 이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전통은 12세기를 거쳐 13세기 전반까지도 지속되면서 고려청자의 유색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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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비색청자 〈청자음각운룡문매병〉
고려 중기의 비색청자 〈청자음각운룡문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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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청자색의 확보는 고려청자의 위상을 당대 최고의 수준에 올려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의 제작 상황을 이해하게 해주는 자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중국청자를 최고로 알고 있었던 중국인들에 의해 기록되어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게 되었다.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청자술병[陶尊]을 언급하면서 “도기의 푸른빛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 하는데 근래에 들어 제작기술이 정교해지고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 하였고, 청자향로에 대하여는 “산예출향(狻猊出香) 역시 비색이다. 여러 그릇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라고 하였다. 또 송대의 문인 태평노인(太平 老人)의 『수중금(袖重錦)』 천하제일조에는 정요(定窯)백자와 더불어 고려비색이 당대 청자의 최고였음을 기록하고 있어 중국인들에게 고려청자의 유색이 얼마나 인상 깊은 것이었는가를 잘 알게 해준다.

11세기부터 색조가 아름다워진 고려청자는 유색에서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완성도에 있어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릇의 기벽은 얇게 성형하고 정리하여 크기에 비해 가벼운 느낌을 주며, 굽 밑에는 작은 규석 조각을 받쳐 구움으로써 완성한 이후 굽 하단부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높은 완성도를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는 17대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청자소문과형병(靑磁素文瓜形甁)>과 일괄 유물에서 확인된다. 이 유물들은 비색에 대한 격조와 세련된 비례, 금속기를 자기로 번안한 노련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청자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새로운 중국 도자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광종 13년(962) 북송과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고려는 성종 12년(993) 거란의 1차 침입 직후 송과의 외교관계를 끊고 요나라와 국교를 맺었다. 북송과 외교관계가 재개된 것은 문종 25년(1071)의 일로 약 80년 동안 송과는 공식적인 접촉이 없었으며 이 시기에 요나라와의 문화적 접촉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02) 李鍾玟, 앞의 글, 2002, p.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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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장릉(長陵) 출토 청자 일괄품
인종(仁宗) 장릉(長陵) 출토 청자 일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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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장릉(長陵) 출토 청자 일괄품 중 참외형병
인종(仁宗) 장릉(長陵) 출토 청자 일괄품 중 참외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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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생산의 경향은 11세기 후반경 송과의 국교가 다시 시작되면서 일변하기 시작한 듯하다. 오랜 기간 동안 송문화의 변화 양상을 접하기 쉽지 않았던 고려에서는 11세기 후반경 이후 공식·비공식적 절차를 통해 새로운 중국 문화를 왕성하게 받아들였으며 이 과정에 도자문화도 예외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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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음각연당초문호
청자음각연당초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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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인 변화는 기종, 기형, 문양 소재, 시문기법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다완 중심의 제작 경향은 다양한 반상용 생활용기와 음주용기, 건축부재, 제기, 악기, 장신구, 종교용품 등으로 넓어져 도자기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활용하는 시점에 들어서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시문기법과 문양 소재의 영향은 11세기 후반 이후 정착된 비색만큼이나 고려청자를 우수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자 생산의 양적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고려청자의 발전에 기여한 기법 중 대표적 사례로는 음각기법이 있다. 가장 손쉽게 적용할 수 있던 이 방법은 북송시기에 유행한 월주요와 같은 중국 남방도자의 영향을 받아 가는 음각과 굵은 음각을 활용한 사례가 남아 있다. 발, 대접, 접시나 매병과 같은 기종에서 볼 수 있는 연판문, 앵무문, 모란절지문, 국당초문, 용문 등은 월주요를 비롯한 음각기법이 중심을 이루었던 중국 제품의 사례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새로운 기법과 문양은 당시의 정세로 볼 때 북방 지역 도자의 영향이 강하여 화북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이 고려청자에 나타났다. 그 중 하나로는 철화(흑화)기법과 퇴화(백화)기법이 해당된다. 중국의 경우 철화기법은 자주요(磁州窯)를 중 심으로 한 북방 지역과 서촌요(西村窯) 같은 남방 지역의 여러 가마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말경부터 12세기에 걸쳐 북방과 연관성 있는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 북방도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중기는 조각기법이 중심인 표현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철화와 퇴화기법은 그리는 기법으로서 조각기법과는 다른 문양 소재가 묘사되어 있다. 소재는 철화기법의 경우 반구장경병, 장고, 매병 등에 간략한 당초문이나 초화문을 넣었고, 퇴화기법으로는 접시나 잔 등에 국화를 점으로 묘사한 예가 많다.103) 국내의 철화청자에 대한 영향문제에서 중국 남방과의 관련가능성을 제기한 논고는 다음의 글이 참고가 된다. 張南原, 「高麗時代 鐵畵瓷器의 成立과 展開」, 『美術史論壇』 18, pp.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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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철화화훼문매병
청자철화화훼문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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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중요한 기술은 압출양각기법의 수용을 들 수 있다. 중국 북방의 요주요(耀州窯)에서 시작된 압출양각기법은 틀을 이용하여 문양과 형태를 찍어내는 방법으로, 규격화된 그릇 제작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생산량 증가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을 기계적인 작업방식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이 방법은 주로 완, 발, 접시와 같은 벌어진 그릇들에서 적용되었다. 고려청자에 시문된 문양으로는 모란문, 모란당초문, 연당초문, 포도문, 화엽문, 운학문, 국화문, 국당초문, 포도동자문 등이 있다. 이러한 압출양각기법의 시도는 북방 지역의 도자문화가 국내에 많이 수용되는 11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듯하며 현존하는 유물로 볼 때 13세기 중반경까지 왕성하게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104) 張南原, 「高麗 中期 壓出陽刻 靑瓷의 性格」, 『美術史學硏究』 242·243, 2004, pp.9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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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사자뚜껑 삼족향로
청자사자뚜껑 삼족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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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양각보상당초문완
청자양각보상당초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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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청자에는 다양한 기법뿐 아니라 북송대의 관요와 요나라 도자에 의한 조형적 영향도 눈에 띈다. 흔히 상형(像形)청자로 인식되어 있는 각종 인물상과 거북, 기린, 사자, 해룡, 원숭이, 오리 등의 동물상과 석류, 복숭아와 같은 식물상 등이 고려 중기에 주자(注子)나 향로, 연적 등으로 형상화되어 만들어졌다. 요나라 지역의 항와요(缸瓦窯), 강관둔요(江官屯窯), 용천무요(龍泉務窯)와 같은 가마에서 제작된 상형도자와 금속기들, 북송의 여요(汝窯)에서 만들어진 각종 상형 자기류는 조형적 측면에서 고려 중기에 형성된 상형자기류의 원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고려의 상형청자는 고도로 숙련된 틀 작업의 정수를 잘 보여주며 조형과 아이디어는 중국 북방문화에서 차용하였으나 결과는 그것을 뛰어넘는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105) 李鍾玟, 「高麗靑磁 龍 裝飾의 樣式的 系譜와 編年」, 『역사와 담론』 53, 2009, pp.321∼359.

이 밖에 안료가 번지는 제약이 있었던 산화동을 적절히 활용한 진사청자(辰砂靑磁)와 여러 태토를 포개어 성형한 후 마무리한 연리문(練理文)자기의 제작, 까다로운 기술임에도 노련하게 구사한 투각기법(透刻技法) 등은 고려 중기에 중국 기술을 고려화시킨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이처럼 고려 중기의 청자는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기술과 조형을 수용하였지만 중국 자기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미감을 형성시켜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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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쌍룡필가(靑磁雙龍筆架)
청자쌍룡필가(靑磁雙龍筆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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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삼채필가(遼三彩筆架)
요삼채필가(遼三彩筆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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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진사 연화문 표주박형 주자
청자진사 연화문 표주박형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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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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