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2. 고려의 색, 청자의 빛
  • 백자에 대한 인식과 제작
이종민

고려시대의 대표적 도자공예품으로 청자가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백자의 존재는 미미하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백자는 청자가 처음 시작된 10세기 전반경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용인시 서 리, 여주 중암리 등지와 같은 한강 이남의 몇몇 전축요계 가마에서 함께 만들어져 기원이 청자와 동일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초기 백자는 청자에 비하여 부수적인 요소였던 듯, 극히 소량만 생산되었으나 용인 서리, 여주 중암리 등지의 가마에서는 백자를 집중적으로 제작하면서 도자 생산의 중심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109) 고려 전기 백자의 제작양상과 양식적 연원관계에 대하여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것. 曺周姸, 「高麗前期 白磁의 特徵과 性格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 장남원, 「고려 전기 해무리굽[옥벽저계]碗의 지속현상에 대한 추론」, 『湖西史學』 50, 2008, pp.32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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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완
백자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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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마에서 청자와 백자를 함께 생산하는 방식은 청자, 백자의 생산 지역 자체가 구분되어 있는 중국과는 다른 점이다. 자기의 녹는 온도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기물을 한 가마에서 구우면서 가마 내부의 온도는 용융점이 낮은 청자에 맞추었고 이러한 번조방식은 고려 중기에도 지속되었다. 그 결과 같은 가마 생산품이라 하더라도 청자는 잘 녹아서 태토의 입자가 치밀질을 보이는 반면, 백자는 덜 녹아 태토입자에 공기구멍이 많이 보이며 유약이 쉽게 떨어져나가는 박락(剝落)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백자의 경우 유약은 녹았는데 태토는 덜 익어 불균형이 심하였던 것이다. 이 현상은 같은 온도라 하더라도 태토에 따라 용융점에 차이가 있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흔히 고려백자를 ‘연질백자’로 지칭하는 것은 이러한 가마 운영 방식의 결과물인 것이다.

11세기경 전국 대부분의 가마가 전축요 대신 토축요로 바뀌고 가마의 크기를 줄여가는 상황에서 백자의 품질은 발생 초기에 비해 오히려 하락해 갔다. 전축요를 계승한 중서부 일원의 몇몇 가마에서는 백자를 활발히 생산하였으나 순수한 백점토를 사용한 예가 드물었다. 특히, 유약은 철분 함량이 포함되어 있어 청자처럼 푸른 빛을 보인다. 같은 시기에 강진을 위시한 서남부 지역의 청자품질이 점점 우수해진 것과는 다른 과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요업의 중심부로 떠오른 강진 지역에서 이 단계에 백자를 제작하지 않았던 것은 특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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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상감모란문매병
백자상감모란문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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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인 12∼13세기경, 백자는 서남부 지역에서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 일대의 가마에서는 당대에 가장 우수한 청자를 생산한 명성에 걸맞게 정교한 백자를 생산하였다. 백자의 형태는 청자의 기종과 동일하였으며 음각, 압출양각, 흑상감, 철화기법으로 간단한 문양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형과정에서의 높은 완성도와는 달리 번조 과정에서는 청자와 함께 구우면서 덜 익는 치명적인 약점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태토와 유약의 결합력이 약하여 완성품은 여전히 치밀하게 녹지 못하였고 후대에 이르러 유약이 박락되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의 백자 제작 수준을 알 수 있는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상감모란문매병>이 참고가 된다. 백토로 매병의 몸체를 만들고 중앙부에 청자토를 감입한 후, 다시 여러 종류의 흑백상감문양을 넣은 이 유물은 고려백자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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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24년’명 백자사리기 일괄품
‘홍무(洪武)24년’명 백자사리기 일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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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소비가 늘기 시작한 고려 중기에도 백자의 생산량이 적었던 원인은 깨끗한 백토를 구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과 더불어 경도(硬度)를 극복하지 못하였던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미 백자의 존재는 고려 초부터 자기를 사용하는 계층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수요도 꾸준하였다. 그러나 항상 한 가마에서 청자와 함께 굽는 제작방식을 고수함에 따라 백자를 제대로 용융시키지 못하여 경도가 약한 연질백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청자에 비해 실용성이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진 듯하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백자에 대한 인식과 수요가 적지 않았던 사실은 수입된 중국백자가 대체품으로 국내에서 많이 소비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후기에도 백자 제작 기술은 크게 진보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금강산의 방화선 공사시에 발견된 <‘홍무(洪武)24 년’명백자일괄품>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1391년에 제작된 이 백자발에는 이성계와 지지자들이 사리기를 사찰에 시주한 내용과 함께 제작지가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임을 알려주는 명문이 있어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발과 향로로 구성된 이 일괄품은 당시 최고 권력층의 시주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도가 약하고 잡물이 많은 등 질이 떨어져 당시 백자의 제작 상태가 완전한 경질백자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알게 해준다.110) 李鍾玟, 「麗末∼鮮初 硬質白磁로의 이행과정 연구」, 『湖西史學』 50, 2008, pp.355∼394.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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