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3. 고려의 생활과 도자
  • 제례와 도자
이종민

청자 발생기의 도자 제작 목적은 차도구의 안정적 확보였으나 차츰 사회의 다양한 소비형태에 맞는 여러 기종들의 제작이 요구되었다. 청자의 제작품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주문자는 왕실로서 도자를 생산하였던 가마에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목적을 위한 그릇들이 주문 제작되었다. 그 중 왕실의 주도로 만들어진 특수한 기종에 도자제기(陶磁祭器)가 있다.

고려의 예제는 10세기 말인 성종(982∼997)대에 가서야 비로소 정비되었다. 송나라의 제례를 기본으로 각종 제례가 성종대에 시작되거나 모습을 갖추었고 이때, 비로소 국가제사가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불교적 국가에서 범본으로 삼은 제례방식은 유교의 예제를 절충한 것이었으며 후일 예종 8년(1113)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여 각종 예제와 의식, 제도 등을 정비하도록 하였다.125) 金澈雄, 『韓國中世 國家祭祀의 體制와 雜祀』, 韓國硏究院, 2003, pp.9∼10.

『고려사』 예지(禮志) 길례(吉禮) 조에 보이는 국가 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잡사(雜祀) 등이 있다. 대사에는 원구(圓丘), 방택(方 澤), 사직(社稷), 태묘(太廟), 별묘(別廟), 제릉(諸陵), 경령전(景靈殿)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대사에 사용하는 기명들의 대부분은 금속기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도자로 제작된 사례가 알려져 있어 경우에 따라 도자제기를 혼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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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4년’명 항아리
‘순화4년’명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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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4년’명 항아리 밑부분
‘순화4년’명 항아리 밑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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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부터 제작된 대표적인 도자제기로는 보(簠), 궤(簋), 두(豆), 준(尊)이 있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보는 벼나 기장을 담을 때 쓰는 그릇으로 외방내원(外方內圓), 즉 바깥부분의 모서리가 각이 지고 내면은 둥근 형태이다. 궤는 메기장과 찰기장을 담는 그릇으로 둥글고 긴 형태의 몸통 내부를 네모 형태로 성형한 내방외원(內方外圓)의 형태이다. 두는 털과 피, 나물, 고기 등 희생물과 찬을 담는 그릇으로 접시처럼 넓은 음식받침과 아래로 벌어지는 긴 나팔형의 다리가 부착되어 있다. 이와 관련한 제기로는 배천 원산리 요지에서 수습된 <청자순화3년명고배>가 유명하다. 준은 맑은 물이나 술을 담아두는 제기로 산뢰(山罍)나 호준(壺尊) 같은 항아리류가 도자기로 만들어진 듯하다.126) 張成旭, 「高麗時代 陶磁祭器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자순화4년명항아리>는 산뢰나 호준을 형상화한 것으로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의 국보 제1056호인 조선 전기 백자청화철화삼산문호와 형태상 매우 유사하여 제기 제작의 전통이 매우 오랫동안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0세기 말 이후 국가 대사에 필요한 도자제기들은 개성 인근의 가마에서 공급한 것이 확실하다. 배천 원산리,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중덕, 여주 중암리 요지 같은 초기 가마들은 국가의 수요가 있을 때 제기를 만들어 납품한 제기 생산 공장이었던 것이다. 다만, 배천 원산리의 경우는 태묘라는 글귀와 제기 감조관이었던 향기장(享器匠)들의 실명이 명문으로 남겨져 있어 특별히 태묘 조성 과정에서 필요하였던 제기를 공급한 가마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왕이 집전하는 국가 대사는 고려 중기를 거쳐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의 제기 중에는 고려 초기처럼 자기로 제작된 제기를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한 흔적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원래 제기는 금속기로 조성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으므로 동기(銅器)가 흔하게 사용되었던 고려 중기에 굳이 잘 깨지는 자기를 만들어 활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제기류 중 향로와 같은 기종들은 고려 중기에 와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금속향로와 더불어 자기향로가 혼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자기향로는 질병이나 냄새제거, 제례용, 불교의식용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형태에 따라 치(置)향로, 병(柄)향로, 현(懸)향로 계통이 알려져 있다.127) 병향로는 손잡이가 길게 달린 향로를 말하며, 현향로는 공중에 매달아 놓고 쓰는 향로 종류를 말한다. 고려시대 자기향로에 대한 분류는 張成旭, 앞의 글, pp.48∼61을 참고. 이 중 고려의 자기향로는 대부분 다리가 달리거나 뚜껑을 얹는 치향로에 속하며 고려 중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예를 볼 수 있다. 치향로들은 박산(博山)의 형태를 뚜껑에 형상화한 박산향로, 중국 고동기를 모방한 정형(鼎形)향로, 뚜껑에 짐승 모양의 형태를 얹은 상형(像形)향로 등이 있는데, 대부분 높이가 20㎝를 넘는 것들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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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정형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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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재료의 구분 없이 크기와 형태에 따라 고려의 향로를 구분하고 묘사한 내용이 전한다. 이를 살펴보면, 박산로는 옷에 향 연기를 쏘이는 용도로 사용하고, 짐승 모양의 향로(獸爐)는 4척(尺)이나 되는 대형으로,128) 1척은 약 30㎝이다.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식행사에서 사용하였다 하여 가례(嘉禮) 시에 활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솥, 형태의 정형향로는 1척에 이르며 도관이나 사찰, 신사에서만 쓴다고 하였는데 청자정형향로는 이러한 형태를 소형의 청자로 제작한 것이다. 고려에서 받아들인 중국의 예서(禮書)들은 주로 국가 대사들 가운데 길례에 필요한 제도와 기물을 제정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점에서 고려 중기의 제례에 사용한 제기로는 청자정형향로가 그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29) 李溶振, 「高麗時代 鼎形靑瓷 硏究」, 『美術史學硏究』 252, 2006. pp.153∼190. 필자는 이 글에서 고려의 청자정형향로가 북송 王甫의 저서인 『宣和博古圖』 같은 예기서를 참고하여 제작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출전하는 산예출향(狻猊出香)을 비롯하여 현존하는 유물 중 뚜껑에 사자, 오리, 원앙, 구룡(龜龍) 등을 얹은 청자삼족향로들은 강화도 곤릉(坤陵)의 묘도부에서 수집된 사례가 있어 반드시 길례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고려 중기에는 여러 형태의 다양한 향로들이 제작되었지만 국가의 길례와 관련해서는 정형청자가 활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향로들은 지방요보다는 강진, 부안 일대의 가마터에서만 생산·조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초의 일부 전축요처럼 제기생산과 관련한 특정한 요장이 지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의 고동기형 제기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 중기 이후 금속 기명이 많이 활용되는 과정에서 각종 제기들은 금속기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자상감모란당초문정릉(正陵)명대접>의 경우는 돌아간 왕비의 제례를 지낼 때 사용하던 일상 생활용 기명으로 곤릉의 출토품들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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