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3. 고려의 생활과 도자
  • 사찰 의식 도구와 도자 소비
이종민

고려시대 자기의 최대 수혜자는 사찰에 기거하였던 승려와 사찰을 후원하던 관련 인물들이었다. 고려시대의 사찰에서는 불교의식에 필요한 각종 공양구나 의식구가 금속이나 도자로 만들어져 사용되었으며, 일상 생활에서는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음식의 섭취나 차를 마시는 기명들이 소비되고 있었다. 자기로 제작된 기물 중에는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공간에서 흔히 발견되기 힘든 유물로 불보살상을 비롯하여 정병, 향완, 사리용기, 발우, 두침(頭枕) 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찰터에서 발굴되는 도자는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상 용기들이 주류를 이룬다.

의식에 필요한 기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부처의 상은 몇몇 사찰터와 가마터에서 확인되고 있다. 전라남도 함평 용천사에서 수집된 <청자나한상>, 전라남도 강진 도암의 용혈사지 출토 <청자보살머리파편>과 <청자나한머리파편>, 동원(東垣) 기증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자나한상>,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각종 불신(佛身)의 파편과 대좌 등은 강진이나 혹은 지방요에서 제작된 인물상들로서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130) 康津靑磁資料博物館, 『고려청자와 종교』, 2002 도록 참조. 이중 용혈사지에서 확인된 불보살 파편들은 제작 수준이 매우 뛰어나고 색조가 비색을 보이고 있어 강진 일대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게 해준다.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불보살상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다. 크기가 소형으로 국한되어 있고 발견지가 대형 사찰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는 철불이나 대형 석불을 안치하기 어려웠던 암자나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소형 사찰, 혹은 불심이 돈독하였던 개인 신자들에게 주로 소비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마에서 제작된 증거가 확실한 사례로 용인 보정리 요지 출토품의 청자보살상과 나한상 등이 있다. 보정리 요지에서는 보살좌상과 나한상을 포함하여 보관, 나한머리편, 불신 단편 등 무려 32점에 이르는 많은 불보살상들이 발견되어 이곳에서 상당량의 산앙상들이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청자보살좌상>은 파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높이는 약 40㎝를 상회하여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불보살상에 비해 크기가 크다. 물레로 기본형을 만들고 장신구나 신체 부위를 붙이는 기법은 이 가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131) 畿甸文化財硏究院·韓國土地公社, 『龍仁 寶亭里 靑磁窯址』, 2006.

사찰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중 주목해야 할 몇 개의 기종이 있다. 고려 중기의 가마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는 정병은 생산량 자체가 많지 않았으나 어느 가마에서든 늘 확인되는 유물이기도 하다. 정병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와 같은 고려불화나 금동불, 석불 등의 조상 사례에서 관음보살이 들고 있는 지물 중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그 의미는 ‘정갈한 물을 담아 중생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였던 의식용 기’ 정도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정병조에는 ‘존귀한 사람과 나라의 관원, 도관과 사찰, 민가에서 다 쓰는데, 다만 물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132) 『宣和奉使高麗圖經』 卷31, 器皿2, 淨甁條, “…貴人國官觀寺民舍 皆用之惟可貯水….” 또 귀부(貴婦)조에는 “부잣집에서는 큰 자리를 깔고 시비(侍婢)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과 정병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 하더라도 괴롭다 하지 않는다.”라는133) 『宣和奉使高麗圖經』 卷20, 貴婦條, “…富家 籍以大席侍婢旁列 各執巾甁 雖盛署不以爲苦也….”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정병은 관청이나 민가에서 물병으로 사용하였으나 사찰에서는 불교의식 용구로 활용하여 소비처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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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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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에 그려진 정병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에 그려진 정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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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침(베개) 역시 고려 중기의 사찰터에서 주로 발견되는 기종에 속한다. 두침은 이미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에서도 중국 당삼채두침을 수입하여 사용한 예가 알려져 있으며 같은 시기의 일본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확인된다.134) 奈良縣立橿原考古學硏究所附屬博物館, 『奈良·平安の中國陶磁-西日本出土品を中心として』, 1984. 이 도자베개가 실용성이 있던 기물인지는 알 방법이 없으나 실생활 용기들과 함께 주로 사찰터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도자베개의 중심 수요 대상이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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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발우(白磁鉢盂)
백자발우(白磁鉢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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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완(香椀)은 일종의 고배형 향로로 대부분은 금속기로 제작되었지만 청자로 제작된 향완도 많이 알려져 있다. 향완에 기록된 ‘…배(排)’ ‘…전(前)’이라는 명문은 안치, 혹은 배치한다는 의미로 불단 앞에 설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로 이해되고 있다.135) 金昶均, 「韓國靑銅銀入絲香垸의 硏究-高麗時代 高杯形을 中心으로」, 『佛敎美術』 9, 東國大學校 博物館, 1988, p.9. 청자향완들 중에는 측면에 범자(梵字)를 흑상감한 예가 많이 남아 있어 향로와는 다르게 향완이 불교의식 용구로 사용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 밖에 뚜껑과 몸체가 한 벌을 이루는 납작한 합, 구멍뚫린 귀에 뚜껑을 끈으로 고정할 수 있는 소형 항아리, 유개합 등이 고려시대의 각종 부도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 승려의 시신을 화장한 후 나온 사리를 넣은 사리기로 활용된 사례가 많이 남아 있다. 또, 평굽 모양의 사발들을 크기별로 포개두었다 사용하는 승려들의 음식용기인 발우 등은 일상생활에 사용한 그릇이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생활 용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의 수 많은 사찰이 전국에서 운영되면서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의식용구와 생활용구가 청자로 제작된 것은 고려에서만 볼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의 결과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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