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4. 청자의 생산과 유통
  • 고려청자의 제작 체제
이종민

고려시대 청자의 생산 체제를 조선시대의 관요 시스템처럼 일관된 제도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것은 시기마다 생산 여건과 소비 여건이 다르게 전개되고 있고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려시대의 청자 제작 단계를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여 알아보자.

먼저 고려 초기는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 전축요가 운영되면서 가마들의 구조나 축요방식, 규모, 생산품 제작에서 일정한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알 수 있듯 전축요들은 약 40m의 길이와 7개의 측면 출입구가 있고 가마의 보수나 개축 과정도 공통점이 있다. 생산품도 중국 옥환저완(玉環底碗)계통의 선해무리굽완에 집중되어 있으며 각종 차 관련 도구들과 일상생활용기, 그리고 제기 등을 동반 제작한 모습이 확인된다. 즉, 기종의 조합 양상에서 각 가마들은 모두 유사한 비율을 갖고 있으며 기형 또한 동일하게 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번조도구의 경우도 각 종 갑발이나 받침 등 요도구의 양상에서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는 가마들 간에 구조와 생산품의 양상이 동일하게 발견되는 현상은 초기 청자 제작기의 가마 운영이 개인에 의해 운영된 사요(私窯)가 아닌 왕실이나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145) 전축요를 豪族들이 소유한 私窯로 본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요약하면 고려 왕실은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하였고, 그 과정에서 전축요가 일거에 폐요되었다고 보고 있다(李喜寬·崔健, 「高麗初期 靑磁生産體制의 變動과 그 背景」, 『美術史學硏究』 232, 2002, pp.21∼55). 특히, 초기 청자 제작기에 한반도에서 청자요업을 주도한 사람들은 중국인 도공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폭적인 국가의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가마 운영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축요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는 태묘(太廟)와 각종 국가 제사에 사용될 제기의 조달을 담당하였던 것에서도 나타난다. <청자순화삼년명고배>와 <청자순화사년명호>는 태묘에 소용될 제기였다. 초기 전축요에서 볼 수 있는 보(簠)나 궤(簋)와 같은 제기들은 국가의 제사에 활용하기 위한 왕실 제기로서 관영 수공업 체제에서나 제작될 수 있는 의미를 지닌다. 운영 체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먼저 ‘소(所)’의 운영 가능성을 들 수 있다. 최근 경기도 고양시 지역에서 발견된 건자산소(巾子山所)는 소로 지정될 마땅한 산물이 발견되지 않는 대신 전축요인 초기청자가마가 위치하고 있다.146) 朴宗基, 「京畿 北部地域 中世 郡縣 治所와 特殊村落 變化硏究」, 『北岳史學』 8, 2001, pp.144∼149. 만약 이것이 자기소라면 고려시대 자기소로 알려진 강진의 대구소(大口所), 칠량소(七良所)보다 빠른 시기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같은 전축요라 하더라도 서산시 오사리와 경기도 용인시 서리 지역은 성연부곡(聖淵部曲)과 처인부곡(處仁部曲)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147) 徐聖鎬, 『高麗前期 手工業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pp.68∼74. 전축요들이 모두 소의 편제가 아닌 부곡의 조직체제 속에서 운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청자 생산의 중심이 남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반 경에는 강진에서는 본격적으로 자기소 체제가 완성된 듯하다. 생산품의 고급화, 초벌기술의 습득과 같은 기술적 진보는 강진의 요업체계가 안정된 바탕 위에서 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 진의 대구소, 칠량소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관영 수공업 체제의 기능을 상실한 전축요의 자리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1세기 경의 강진요는 생산량이 증가하고 품질이 다양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생산품의 일부는 왕실이나 개경의 주요 관청에 납품되었을 것이며, 나머지는 상품으로써 사찰이나 고급 수요층에게 팔려나갔을 것이다.

11세기 후반 이후부터 새로운 중국 도자의 조형과 제작기술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고려청자는 크게 변하며, 이를 중기의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강진 일대와 부안 진서리, 유천리 일대에서는 음각, 압출양각, 상감기법 등에 의한 양질의 청자들이 제작되었고 이들은 폭이 넓어진 수요 계층을 위해 유통되었다. 이 시기에 해남과 인천 지역에서는 품질이 매우 떨어지는 청자류가 생산되면서 값싼 청자들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품질 간의 편차는 매우 다양하였다. 특히, 12세기 중반 이후 중부 내륙 지방에서는 지방 수요를 위해 많은 가마들이 생겨났는데, 이곳에서의 생산품들은 압출양각과 음각기법으로 강진의 청자를 모방한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고려초부터 강진의 대구면과 칠량면에 존재하였던 자기소는 고려 중기까지 지속된 듯하다. 그러나 부안 지역은 부곡(部曲)과 같은 특수 촌락의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48) 李喜寬은 호암미술관 소장 靑磁象嵌菊牧丹文辛丑銘벼루에 등장하는 명문(1181년 5월 10일 大口所의 前戶正인 徐敢夫를 위해 맑은 청자 벼루 한 개를 만들었다. 黃河寺)을 검토하여 이 청자가 부안산으로 추정되며 부안 요업의 주체는 명문에 보이는 사찰인 黃河寺로서 결국 私窯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李喜寬, 앞의 논문, 2000, 강진청자자료박물관, pp.61∼80). 그러나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은 사찰이 강진에 버금가는 부안요를 관장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밖에 사찰에서 운영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가마로 제천시 송계리에 있는 사자빈신사지(獅子瀕迅寺址)의 가마터를 들 수 있다. 인근 지역이 험준하여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별로 없고 다른 소비처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가마는 바로 사찰에 필요한 청자를 조달하였음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고려 중기에 활동한 지방요 중에는 군·현(郡縣)체제 속에서 운영된 것으로 보이는 가마들이 많이 존재한다. 중부 지방의 청자 양식은 강진청자와 유사하여 강진의 조형양식이 전국의 지방요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이해되나, 한편으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해야만 하였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부내륙의 지방요들은 민요의 개념에 가까운 사요라기보다는 특수 촌락이나 군현의 통제를 받는 가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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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구완동 청자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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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지방청자 생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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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고려 중기에 볼 수 있는 청자의 생산체제는 강진, 부안이 중심이 되는 양자 구도가 아니라 지방요가 확산되면서 여러 가지 생산방식이 공존하는 다원적 체제 속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원 간섭기 이후 고려는 각종 물자를 수탈당하였고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기에 직면하였다. 원의 지나친 공물 요구에 따른 과중한 공역 부담과 권력층의 소(所) 점탈 등은 소의 해체를 가속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149) 朴敬子, 「14세기 康津 磁器所의 해체와 窯業체제의 二元化」, 『美術史學硏究』 237, 238, 2003, pp.110∼113. 所의 해체는 이미 12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金炫榮, 「고려시기의 所에 대한 재검토」, 『韓國史論』 15,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6). 그러나 자기소의 해체도 같은 과정을 겪고 있는 지에 대하여는 재고해야 할 것이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 그동안 기명의 중요한 일부를 담당하였던 동기(銅器)를 대체하여 청자의 수요가 증가한다.150) 李鍾玟, 「14世紀 後半 高麗象嵌靑磁의 新傾向-음식기명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01, 1992, pp.5∼40. 이 시기의 청자 생산은 고려 중기까지 고급 청자 생산의 중요한 축이었던 부안의 요업이 약화되고 대신 강진과 다른 지역의 생산이 급증하는 현상을 보인다.151) 특히, 干支銘象嵌靑磁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14세기 전반의 경우(13세기 후반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자세한 언급을 생략한다), 강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청자를 생산한 가마의 예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13세기까지의 수 많은 특수촌락, 혹은 군현, 사찰 등에서 운영하였던 가마들이 갑자기 몰락하고 마치 강진의 자기소만 남아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실제 그 시기의 상황이 그러하였는지, 아니면 청자양식을 잘못 이해하여 생긴 일인지는 차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14세기 후반 강진 이외의 가마터 양상은 朴敬子, 앞의 논문, 2003, p.124의 <표 2> 참고.

당시의 청자 요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는 1389년 조준(趙浚)이 올린 상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사옹(司饔)에서는 각 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궁중에서 쓰는 자기의 제조 감독을 일 년에 한 차례씩 하였는 데 공을 빙자하여 사익을 취한다. 한 도에서 가져가는 것이 80∼90 수레에 이르나 서울에 이르는 것은 1/100이고 모두 사취하니 폐가 이보다 심함이 없다.”고 하였다.152) 『高麗史節要』 卷34, 恭讓王 1년 12월조, “大司憲 趙浚等上書曰…司饔 每年遣人於各道 監造內用瓷器 一年爲次 憑公營私 侵漁萬端 而一道駄載 至八九十牛 所過騷然 及至京都 進獻者 百分之一 餘皆私之 弊莫甚焉.”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왕실에서 필요한 자기를 감조하되 각 도에서 수급을 받았고 일정한 시기에만 공납품을 제작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강진뿐만 아니라 지방의 다른 가마들도 공납품을 제작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며 강진의 전통적인 자기소로서의 위상은 14세기에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153) 韓盛旭, 「高麗 後期 靑瓷의 器形 變遷」, 『美術史學硏究』 232, 2001, pp.58∼61. 이 단계의 지방요들을 민요로 보아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필요에 따라 감조를 받으면 되므로 14세기의 청자 제작 체제는 국가나 관청의 관여에서 어느 정도 자유스러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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