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5. 국운과 함께 한 청자
  • 간지명 상감청자의 제작
이종민

고려시대 후기의 상감청자 중에는 그릇의 한 부분에 간지(干支)를 상감으로 새겨넣은 예들이 나타난다. 흔히 간지명 상감청자라 불리는 자기류는 간지의 존재로 인하여 연대 추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를 통해 이와 유사한 조형 양식을 비교하면 청자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진 이들 청자류는 1987년 보령 앞바다에서 기사(己巳)명 대접과 함께 100여 점의 상감청자가 인양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60개의 간지 중 청자의 명문으로 발견되는 간지들은 기사(己巳), 경오(庚午), 임신(壬申), 계유(癸酉), 갑술(甲戌), 임오(壬午), 정해(丁亥), 을미(乙未) 등 8종이 있다. 간지명 청자는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7호 요지와 계율리 18호 요지, 수동리 1호 요지 등에서 생산된 예가 알려져 있으며 소비처로는 개성의 만월대, 화순 운주사, 고흥 제석사, 강화 선원사 등지에서 발견된 예가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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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화훼문 기사(己巳)명 대접
청자상감화훼문 기사(己巳)명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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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화훼문 기사(己巳)명 대접
청자상감화훼문 기사(己巳)명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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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에 간지를 새긴 목적은 대몽항쟁 이후 저하된 품질의 향상과 납품 과정에서 토산 공물이었던 강진 청자가 중간 관리층에 의해 포탈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159) 韓盛旭, 「高麗後期 靑瓷의 器形 變遷」, 『美術史學硏究』 232, 2001, pp.57∼99. 당시의 시대상황을 통하여 간지를 새긴 이유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자.

14세기에는 집권층에서 사선(私膳), 별선(別膳)의 형태를 통해 공물을 무리하게 징수하는 예가 빈번하였고, 지방 관리들까지도 국가의 수취체제를 잠식함으로써 그 폐해가 끊이지 않았다. 특산물을 생산하는 각종 소에서는 국가적, 개인적 차원의 세금 징수가 생산능력을 초과함으로써 생산에 종사하는 계층은 상당한 고통을 감수해야 하였다.160) 사료에는 13세기 말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私膳, 別膳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려는 上疏나 下敎의 기사가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 ①『高麗史節要』 卷19, 忠烈王 1년 11월조, ②『高麗史』 志38, 刑法1, 職制, 忠烈王 24년 정월조, ③『高麗史』 志38, 刑法1, 職制, 忠肅王 5년 5월조, ④『高麗史』 志 38, 刑法1, 職制, 恭愍王 11년 6월조. 생산과 관리, 수취를 담당하였던 중간 관리층 역시 무거운 부담을 회피하고자 권력자에게 기탁하는 예가 적지 않았으며 그 결과 공역의 의무가 있었던 소에 대한 수취권 역시 미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도자기 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던 자기소의 경우에 있어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하다. 14세기에 이르러 자기소의 운영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사실상 줄어들고 유산 계급이나 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옹의 관리들에 의한 사적 침탈이 심하였던 것이다. 1389년 조준(趙浚)이 올린 상소에서 “사옹 산하의 자기소에 관리를 년 1회씩 관리를 파견하여 내용 자기를 감조하게 하였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161) 주 67)과 같음. 이미 붕괴된 자기 수급 체계를 확인해 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문헌 자료로 볼 때 결국 도자의 공납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각종 폐해를 방지할 수 있던 방법이 글자를 직접 새기는 것이었고 이것이 간지명을 새기게 한 이유가 분명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간지명 청자는 공납 자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간지를 새긴 기종은 대접, 접시, 사이호, 잔, 고족배 등에서 주로 나타나며 문양은 상감기법을 이용하여 화훼조충문, 유로수금문, 여지문, 운학문, 국화문, 운봉문, 연당초문 등 고려 후반에 유행하였던 문양들을 표현하였다. 문양의 표현 방식은 여백을 많이 남기고 문양을 새긴 도장으로 간단히 찍어 상감하였으며 문양 간에 대칭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다른 상감청자에 비해 비교적 품질이 우수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성형을 두껍게 하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등의 모습은 청자의 품질이 저하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간지명 청자가 명문있는 청자들 속에서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간지가 언제인가에 따라 같은 양식을 보이는 청자들의 제작 연대가 연대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강진 사당리 7호요지 발 굴조사에서는 원나라 연호인 지정(至正, 1341∼1367)명 파편과 함께 정해명 파편이 동반 출토된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정해명은 1347년경에 제작된 것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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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丁亥)’명 상감청자
‘정해(丁亥)’명 상감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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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 ‘지정(至正)’명 파편
청자상감 ‘지정(至正)’명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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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여 다른 간지명 청자들은 정해명 파편에 비해 문양표현 방식이나 제작 상태, 유색 등 여러 면에서 품질이 좋아 대부분 13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이렇게 해석하였을 때 간지명 청자는 13세기 후반에 집중 제작되다가 수십 년 동안 중지된 후 14세기 중반에 다시 만들게 되는 셈이 된다. 이러한 해석상의 어색함과 최근 고고학적 성과물의 증가에 힘입어 최근에는 모든 간지명 청자가 14세기 전·중반 사이에 집중적으로 제작되다가 사라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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