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
  • 05. 국운과 함께 한 청자
  •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다
이종민

14세기의 고려 사회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고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 원나라의 간섭을 심하게 받고 있었고 원·명의 교체기(1367, 원 멸망) 이후에는 명과의 관계가 소원한 상태였다. 국내 상황은 정치력, 경제력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친원파 권문세족에 의한 부패로 국가 재정은 곤핍을 면하기 어려웠다. 공민왕 이후 신진사대부들이 각종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사회질서는 이미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각종 산업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수취 체제의 문란을 감내해야 하였던 도자산업에서는 그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말에 나타난 신분 상향 현상, 무원칙한 남설로 과다하게 늘어난 지방의 관청,162) 李羲權, 「高麗의 郡縣制度와 地方統治政策-主·屬縣考察을 中心으로」,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p.257. 경쟁적인 사치풍조와163) 『高麗史節要』 卷25, 忠惠王(復) 5년조. 유동(諭銅)의 절대적인 부족 현상은164) 『高麗史節要』 卷25, 忠惠王(復) 4년조. 궁극적으로 도자기 사용의 확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신진사대부들의 잇따른 상소는 그 사실을 잘 말해준다. 공양왕대의 중랑장 방사량(房士良)이 “유동은 본토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아니니 이제부터 동철의 사용을 금하고 오로지 자기와 목기를 써서 습속을 고치도록 하소서.”라고165) 『高麗史』 志39, 刑法2, 禁令條. 건의한 내용은 그 중 하나이다. 분명 소비계층이 늘어나고 그릇 제작의 중심 재료 중 하나였던 동의 부족은 자기 생산이 확대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가 자기 생산의 양적 확대로 이어졌는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14세기에 청자를 생산한 가마의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11세기경부터 지속적으로 요업이 지속되어 오던 강진의 경우 충정왕 2년(1350)을 기점으로 끊임없이 출몰한 왜구에 의해 도자 생산은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미 13세기 후반 이후 공물의 수취 과정에서 나타난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와 중간 관 리층의 농간에 의한 노동 강도의 증가는 청자의 품질관리가 더 이상 무의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화려하고 다양하였던 기종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몇 종의 음식용 기명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 품질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생산 계층인 도공에게 몰려드는 주문을 소화할 수 있던 방법은 빠르고 손쉬운 제작방식을 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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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모란당초문 ‘정릉(正陵)’명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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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모란당초문 ‘정릉(正陵)’명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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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생산 과정은 일단 대충 성형한 후 굽과 기벽을 깎고, 작은 도장으로 몇 군데에 반복적인 문양을 찍고는 상감토를 감입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간단한 의장, 문양의 반복시문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가마 속에는 갑발을 사용하지 않은 채, 포개구이나 가마바닥에 한 줄씩 깔아 적재한 후 구웠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청자에 재 흔적이 남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예전의 시도는 모두 배제되었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은 모두 생략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14세기의 청자는 그릇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예리함을 상실하였으며 반복적이고 도식적인 문양 소재만이 표현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유물의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모란당초문 「정릉(正陵)」명 대접>이다. 정릉은 1365년 돌아간 공민왕의 부인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으로 대접은 정릉에서 제례 때 쓰기 위해 제작한 왕실 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에 앉아 있는 재의 흔적이나 엉성한 문양,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작방식은 열악하였던 도자 상황을 잘 보여준다. <청자상감버드나무문 「을유사온서(乙酉司醞署)」명 매병>도 마찬가지이다. 사온서는 왕실의 술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이 기관이 존속하였던 시기와 을유년이 겹치는 연도는 1345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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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버드나무문
청자상감버드나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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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화려하였던 매병과 비교하면 품질이나 문양의 상태는 도저히 같은 계통의 기물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엉성하다. 이 밖에도 제작 연대를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14세기의 많은 청자자료들은 고려가 기울어가면서 함께 쇠퇴해 간 청자의 모습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청자는 고려의 개국 이후 생산이 개시되었고 국가가 융성할 때는 함께 전성을 구가하였으며 쇠락할 때에는 운명을 같이하였던 고려의 분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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