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1. 전통의 계승과 소박한 파격의 미, 분청사기
  •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새로운 탄생
전승창

분청사기라는 말은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유물이 제작되던 조선 전기에 사용되던 단어도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학자나 골동수집가들에 의해 ‘미시마[三島]’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은 유래나 의미가 불분명하여, 한국인 미술사학자였던 우현 고유섭 선생은 유물을 분류하고 특징을 정리하여 분장회청사기라고 이름을 붙였으며,167) 고유섭, 「고려도자와 조선도자」, 『우현 고유섭 전집』 2-조선미술사 하, 열화당, 2007, pp.371∼389. 분청사기라고 줄여 부르고 있다. 그릇 표면의 일부 혹은 전면에 백토가 얇게 칠해져 있고 유물이 대체로 회청색을 띠는 사기(자기와 동일한 의미로 혼용되었음)라는 의미로 고려시대의 청자나 조선시대의 백자와 구분되는 특징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청자나 백자와 구분되는 분청사기의 대표적인 특징은 표면에 백토를 바르고 그 위에 갖가지 기법으로 다양한 소재를 장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상감기법으로 장식된 분청사기는 그릇 표면에 백토를 칠하지 않은 것이 많고, 장식기법이나 소재, 색 등에서 고려시대 상감청자와 동일하거나 유사하여 구분이 모호하기도 하다. 보물 제1386호인 <청자상감어룡문매병>은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분청사기가 아닌 청자로 분류된다.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지만 고려 말기의 청자 제작전통은 조선 초기에도 지 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제작된 유물이 청자로 분류된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는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어, 보는 이에 따라 청자도 되고 분청사기도 되는 문제를 안고 있으며 도자사 연구에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다.

조선은 개국 직후 금속원료의 부족으로 금속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는데, 이 정책은 결과적으로 도자기의 수요와 제작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금속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은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은 물론 동으로 만든 것도 대상이었다. 조선 조정은 중국 명나라에서 강요받은 금은그릇의 세공이 재화를 고갈시키자 공납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왕실과 일반인의 소용을 줄이고 신분에 따라 일정량을 할당하는 방법으로 민간이 갖고 있던 금과 은을 거두어들였다.168) 『태종실록』 권12, 6년 윤7월 18일 ; 『태종실록』 권17, 9년 1월 21일 ; 『세종실록』 권7, 2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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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에서는 금광이나 은광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필요한 금속의 물량은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개국 초기에 왕실이나 민간이 보유하고 있던 금은그릇의 절대량은 고려 후기에 중국 원나라와 교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국내외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였다. 금속원료의 부족 현상은 동도 마찬가지였다. 군수물자 제조와 동전 및 금속활자의 주조에 원료가 되는 동은 개국 이후 더욱 많은 양이 필요하였다. 특히, 세종 때에는 동전의 주조에 막대한 양의 동을 사용하여, 국가나 민간에 심각한 물량 부족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그 부족분을 일본에서 수입하기도 하였다.169) 유승주, 「조선 전기후반의 은광업 연구」, 『진단학보』 55, 1983, pp.15∼54 ; 원유한, 「화폐유통정책」, 『한국사론』 11, 국사편찬위원회, 1986, p.129.

금속에 대한 강력한 규제 로 인해 금속그릇을 자기로 대체해 사용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1407년 성석린은 금은그릇을 대신해 나라 안이 모두 사기와 칠기를 쓰게 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절치부심하는 조선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1418년에는 전사(典祀)에서 금속제기를 자기로 만들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170) 『태종실록』 권13, 7년 1월 19일 ; 『세종실록』 권3, 원년 4월 13일. 이후에도 금속그릇을 자기로 대체하려는 노력은 꾸준하였다. 제례를 중시하던 왕실은 물론 지배층도 금속제기의 사용이 어려웠으므로, 이를 대신한 자기의 제작은 이전보다 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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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인화원권문 ‘김해장흥고’명 접시
분청사기 인화원권문 ‘김해장흥고’명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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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조선 개국 이후 집중된 금속그릇 사용 규제와 자기로의 대체는 분청사기의 수요나 제작이 급증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한편, 분청사기의 수요 증가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관청에서 세금으로 거두어 사용하던 분청사기를 도용하거나 사장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17년 공물로 바치던 사기와 목기에 ‘장흥고’ 석자를 새기게 하고 다른 관청에 납부하는 것도 각각 관청의 이름을 새겨 바치게 하였다.171) 『태종실록』 권33, 17년 4월 20일. 실제로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 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그릇 표면에 관사의 명칭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 전하고 있다. 유물에 새겨진 관사의 명칭은 공안부(恭安府), 경승부(敬承府), 인녕부(仁寧府), 덕녕부(德寧府), 인수부(仁壽府),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예빈시(禮賓寺), 장흥고(長興庫) 등으로 다양하다. 명칭은 그릇의 안팎면에 도장으로 찍거나 칼로 새겼으며, 관사의 명칭과 함께 지방의 이름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방의 이름은 고령, 합천, 경주, 성주, 경산, 밀양, 창원, 양산, 진주 등이 주 로 발견되는데, 특이하게도 경상도 지역이 대부분이다. 특정 지역이 집중되는 이유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지명이 고르게 나타나지 않는 원인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분청사기 중에서 특정한 시기에 설치되고 사라지는 관사명이 있는 유물은 당시의 제작 경향, 기술 수준, 발전 과정, 제작지의 운영 시기를 파악할 수 있어 학술자료로 중요하다.

분청사기의 수요와 제작이 증가하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품질의 향상에도 관심을 갖는다. 1421년에는 공물로 진상하는 그릇이 단단하지 않아 깨지므로 장인의 이름을 쓰게 하여 함부로 만든 그릇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전세품이나 가마터에서 출토된 파편을 살펴보면, 1420년대 이후 1430∼1460년대 사이 만들어진 분청사기는 질이 개선되고 장식이 정제되어 있다.172) 『세종실록』 권11, 3년 4월 16일(강경숙, 『한국도자사』, 일지사, 1990, p.314 및 강경숙, 「분원 성립에 따른 분청사기 편년 및 청화백자 개시문제 시론」, 『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p.1477).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해 분청사기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가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한다.

1424∼1432년 사이 자료조사를 한 『세종실록지리지』의 토산조에는 전국에 자기소 139개소, 도기소 185개소 등 모두 324개의 도자소가 운영된 것으로 나타난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도자소에서는 분청사기를 주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73) 김영원, 「조선시대 요업체계의 변천」, 『미술자료』 66, 국립중앙박물관, 2001, pp.17∼45. 수요가 급증하고 다양한 종류의 그릇 제작이 확산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대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에서 사용할 금속원료의 부족으로 금속그릇의 사용을 제한하면서 더욱 확대되었고, 국가의 안정과 경제력 향상, 그리고 새로운 신분질서 등으로 자기의 수요가 증가한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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