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1. 전통의 계승과 소박한 파격의 미, 분청사기
  • 편년자료와 분청사기의 변화
전승창

관사의 이름이 있는 유물 이외에도 분청사기 중에는 구체적인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는데, 이것을 ‘편년자료’라고 부른 다. 분청사기의 전체 수량에 비하면 편년자료의 수는 적지만 그릇의 특징, 장식기법, 소재의 변화 과정, 그리고 같은 시기에 제작되던 백자와의 관계에 대한 개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15세기 편년자료의 숫자는 백자에 비해 분청사기가 많은데, 당시 관청이나 일상생활에서 분청사기가 주로 사용되고 백자는 상대적으로 소량 제작되어 공납되거나 일부 계층에서만 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분청사기 편년자료는 개국 초기부터 1460년대 사이에 주로 분포하며, 백자는 1450년대부터 16세기까지 밀집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할 백자의 제작을 전담하던 관요가 설치된 이전과 이후 시기에 따른 제작 경향의 변화로 해석된다.

확대보기
분청사기인화국화문사이호
분청사기인화국화문사이호
팝업창 닫기

분청사기 편년자료의 종류는 잔, 대접, 접시, 반을 비롯하여 원통모양 묘지석, 태항아리 등 각종 유물이 알려져 있다. 이 중에는 경승부(1402∼1418), 공안부(1400∼1420), 인녕부(1400∼1421), 덕녕부(1455∼1457)등 관사의 명칭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를 차지한다. 세종대왕의 따님이신 정소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1412∼1424년 사이의 <분청사기사이호>를 비롯하여, 온녕군 묘에서 출토된 1454년 <분청사기접시·호>, 월산군의 태호로 1454∼1462년 사이에 제작된 <분청사기인화국화문태호>가 대표적이며, 개국 초부터 1460년대 초까지 왕실에서 분청사기를 다수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편년자료를 살펴보면 15세기 초에는 접시나 대접에 상감과 인화장식이 있는 분청사기가 공존하지만 중반에는 인화장식이 많아지는 변화가 확인된다. 이후 후반에는 철화나 귀얄장식으로 대체되 며, 유물의 종류가 묘지석(墓誌石)으로 단순해지고 수량도 이전에 비하여 급격하게 감소한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백자에 대한 사대부의 인식과 수요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면, 1445년 도순찰사 김종서가 고령에 들러 백자를 보며 칭찬하거나, 1447년 병조판서 이선이 백자를 선물 받은 일로 탄핵되는 등 백자에 관한 다양한 기록이 각종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74) 『점필재집』, 彛尊錄, 先公事業4 및 『세종실록』 권116, 29년 윤4월 7일. 이와 같은 문헌기록은 1440년대에 일부 지배층 사이에서 백자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후 경기도 광주에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할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제작체계를 갖추었다. 조선의 백자는 급속하게 발전하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지배층 사이에서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관요가 설치되고 백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분청사기는 공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왕실 및 지배층의 관심과 수요에서 멀어져 수요자의 폭과 범위가 더욱 좁아졌다. 결국, 편년자료를 통해본 분청사기는 15세기 중반까지 왕실이나 지배층의 취향에 맞추어 제작되지만 후반부터는 지방 수요에 따른 새로운 장식기법과 소재로 급격하게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6세기에는 세부 장식을 생략하고 당시 유행하던 백자처럼 표면을 하얗게 보이려는 변화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끝내 제작이 중단되고 말았다. 분청사기는 백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제작되고 변화되며 사라졌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