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2. 왕실 백자의 제작지, 경기도 광주
  • 관요의 운영과 관리
전승창

광주에는 300여 곳에 가마터가 남아 있으며 설치 시기에 따라 분포 지역이나 가마의 이설, 가마의 수에 차이가 있다. 퇴촌, 중부, 광주, 초월, 도척, 실촌, 남종 등 7개의 시와 읍, 면에서 고루 발견되 며 해발 고도 50∼185m 사이에 설치되었다.183) 경기도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광주중앙관요』, 2000, pp.318∼321. 가마터의 수는 15∼16세기에 설치된 곳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수요 증가에 비례하여 제작량이 늘었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들 가마터의 분포상황을 보면, 광주 중부와 북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많은 수가 집중되어 있다. 또한, 한강과 접하는 비교적 커다란 계곡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수목이 무성한 곳을 택해 설치된 특징이 나타난다.

관요 설치 이전 광주에서는 분청사기와 함께 백자도 제작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토산조에는 광주 7곳에 도자소가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425년 세종대왕의 명에 따라 중국 사신 윤봉에게 줄 ‘백자장군’을 만들 정도로 수준 높은 제작능력과 기술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442년부터 6년간 김숙자(1398∼1456)가 고령현감으로 있을 때 사기장에게 사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세공하던 백사기의 질이 광주보다 훌륭해졌다는 『점필재집』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 최고 품질의 백자를 비교할 때 광주를 언급한 것이 주목된다. 기록에서는 광주와 남원, 고령에서 해마다 백자를 진공하였다고 하였는데, 관요설치 이전에 운영된 광주 우산리 가마에서 ‘인(仁)’, ‘사(司)’ 등 관사명 파편과 궁중 소용을 의미하는 ‘내용(內用)’ 명이 있는 백자 파편이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184) 해강도자미술관, 『광주 우산리 백자요지(Ⅱ)-17호 백자요지 시굴조사 보고서』, 1999 및 『광주 우산리 백자요지-2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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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사(司)’명 파편
백자‘사(司)’명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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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는 1466∼1468년 사이 설치되어 일정한 운영체계에 따라 백자를 제작하였다. 설치 이후부터 16세기까지는 ‘사기소’ 혹은 ‘사옹원 사기소’로 불렀으며, 17세기부터는 사옹원의 지점이라는 의미의 ‘분원’이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고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관요 설치와 사옹원의 운영은 국가의 새로운 요업체계 확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백자의 흐름을 왕실과 관청에서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고 백자가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도자공예품으로 자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관요의 운영과 관리는 사옹원 관리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왕실용 자기의 제작을 감독하던 실무 책임자는 관요 설치 이전과 이후에 차이가 있다. 물론 관요 설치 이전에도 조선 조정의 관리와 감독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1411년 “내수 안화상을 경상도 중모, 화령 등의 현에 보내 화기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185) 『태종실록』 권21, 태종 11년 4월 29일. 그런데 『고려사』에도 “사옹이 매년 사람들을 각도에 파견해 내용 자기의 제작을 관리하고 감독한다”고 나타나므로,186) 『高麗史』, 列傳1, 趙浚傳. 전국 도자소에 관리를 파견해 왕실용 자기의 제작을 감독하던 고려 말기의 제작 체계가 수십 년이 지난 조선 초기에도 꾸준히 행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왕조가 바뀌었지만 왕실용 자기를 제작, 관리하는 방법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187) 전승창, 앞의 글, 2007, pp.8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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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분원리 번조관 공덕비
광주 분원리 번조관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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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전국 도자소에 파견된 관리는 내수 안화상을 비롯한 내시였는데, 이러한 운영체계는 늦어도 고려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개국 후에도 계속되었지만 내시의 관리, 감독이 언제까 지 지속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관요 설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옹원 관리가 감독하는 체제로 변화된 것은 분명하다.

관요에서 실무를 감독하던 사옹원 관리를 ‘번조관(燔造官)’이라 불렀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용재총화』에는 ‘사옹원관’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어서 언제부터 ‘번조관’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540년 “사옹원 봉사 한세명은 지금 사기번조관으로 외람된 짓을 많이 저질렀다.”고 하는 기록에서 비로소 나타난다.188) 『중종실록』 권93, 중종 35년 5월 11일. 즉, 관요를 관리하기 위해 종8품 봉사가 번조관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관요 설치 이전 내시는 전국 도자소에 내려가 왕실용 자기 제작을 감독하는 것이 임무였지만, 관요 설치 후 번조관은 왕실 및 관청용 자기 제작의 관리와 감독은 물론, 가마운영, 화원의 인솔, 사기장 관리까지 맡는 등 역할에 변화가 생겼다. 번조관이 관요에서 얼마동안 체류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매년 사옹원 관리를 관요에 파견하며 좌우변으로 나누어 봄부터 가을까지 백자를 제작, 감독하여 어부에 수납한다.”는 『용재총화』의 기록으로 보아 결빙기인 2∼3개월을 제외하고 장기간 상주하였으며, 이것은 380명의 사기장도 마찬가지였다.

사기장들은 번조관의 성품에 따라 일희일비하였다. 예를 들면, 사옹원 봉사에 관한 기록에서 “사기번조관으로서 사기장에게 외람된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데리고 있는 장인들에게 사적으로 쓸 사기를 일률적으로 얼마씩 징납하였습니다.”라고 하는 등 번조관이 직분에서 벗어나 관요백자를 강제로 빼돌리는 부조리도 행해졌다. 번조관의 횡포는 사기장들을 관요에서 이탈하게 하는 심각한 문제도 초래하였다. 관요 설치 후 수십 년이 지나 관요 사기장들이 본격적으로 이탈을 하게 되는데, 일도 힘들었지만 번조관의 전횡에도 원인이 있었다.

사기장은 사옹원 소속으로 매년 380명이 관요에서 왕실과 관청 용 백자를 제작하였다. 관요 설치를 전후하여 지방 제작지에서 질이 좋은 자기를 만들던 장인들을 선별하여 대규모로 사옹원 소속 경공장으로 편성하고 역을 지게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사기장들이 속해 있거나 운영하던 지방 제작지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유능한 장인이 사옹원 소속 사기장이 되면서 전국 각지의 자기 제작은 줄어들었다.189) 전승창, 「15세기 분청사기 및 백자의 수요와 제자성격의 변화」, 『미술사연구』 12, 1998, pp.51∼84. 또한, 매년 일정한 양의 사기를 수납하였던 국가가 이를 줄이거나 없애 전국의 제작지는 살아남기 위해 민수용 도자기의 제작에 힘써야 하였다. 즉, 관요백자는 빠르게 발전하였지만 지방의 제작지는 그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며 제작되던 분청사기는 질과 장식기법이 크게 변화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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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의 사기장
『경국대전』의 사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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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사옹원의 관리가 어기를 제작한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조의 내용으로 보아도 관요 설치 후 관리를 파견하는 등 왕실과 관청용 백자는 나날이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380명의 사기장이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였고 대규모의 인원을 어떠한 체제로 운영하였는가에 대한 조선 초기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비록 후대이지만 1625년 『승정원일기』에는 “호와 봉족을 합해 1,140명이던 분원의 사기장이 해마다 핑계를 대고 도망해 겨우 821명만이 남아 있다.”고 적고 있어 사기장의 운영은 ‘분삼번입역제(分三番入役制)’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190) 『승정원일기』 인조 3년 7월 2일. 그러나 1,140명 정원이었던 사기장은 힘든 작업과 번조관의 전횡으로 이미 16세기 초반 소속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7세기 전반에는 821명으로 줄었고, 19세기 후반 관요의 규모와 규정을 기록한 『분주원보등』에는 총인원이 552명으로 되어 있어 관요의 인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관요에서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인 백토와 땔나무의 공급이 중요한 문제였다. 백토는 16세기에 “사기를 만드는 백점토는 이전에 사현이나 충청도에서 가져다 썼지만 지금은 양근에서 파다 쓴다.”는 기록이 있고,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는 양구, 봉산, 진주, 선천, 충주, 경주, 하동, 곤양 등지에서 상황에 따라 채취하였다. 이와 아울러 18세기 중반에는 “사옹원 번조사기의 원료로 광주, 양구, 진주, 곤양 등지의 백토가 가장 적합하다.”고 하는 등 광주에서도 질이 좋은 백토가 채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191) 『중중실록』 권67, 숙종 25년 2월 2일 ; 『비변사등록』 효종 4년 11월 30일 및 숙종 16년 10월 28일 ; 『승정원일기』 숙종 22년 9월 6일 및 23년 7월 26일, 27년 8월 14일, 9년 8월 4일 ; 『오주연문장전산고』권27, 「古今瓷窯辯證說」; 『六典條例』(1867)권2, 吏典, 사옹원조 ; 『임원경제지』, 「倪圭志」 권3. 가마의 운영시기와 백토굴취 지역에 관한 기록이 일치하는 경우, 관요백자의 배토산지 확인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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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음각간지명 대접 파편
백자음각간지명 대접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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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기 제작에 소용되는 땔나무[燔木]의 조달이었다. 관요는 백자 제작에 필요한 연료인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숲이 울창한 지역을 조정에서 분할받아 그 곳에서 나무를 채취해 사용하였다. 땔나무 조달은 관요 운영이나 가마 이설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고, 현재 광주에 수많은 가마터가 산재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당시 관요 이설에 주기가 있었던 것인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후대 기록인 1676년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대략 10년이 주기였다. 기존에 발굴된 관요 중에서 운영 시기가 확인된 대표적인 곳이 선동리 2호 가마인데, 이곳에서 간지가 적힌 백자 파편이 다수 출토되었다.192) 『승정원일기』 숙종 2년 8월 20일(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광주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 1986, p.208). 간지는 10년 분(1640∼1649년)으로 관요가 땔나무 수급 때문에 약 10년을 주기로 이설하였다던 문헌기록의 내용이 확인되었다. 즉, 관요는 연료인 땔나무가 고갈되면 이설하였으며, 한 곳의 제작 기간이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10년이 주기였던 것이다.

가마의 주기적 이설은 1752년까지 계속된 후, 이후에는 현재의 남종면 분원리에 가마를 고정하고 땔나무를 운송해 사용하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가마의 이설주기가 반드시 지켜지지는 않았으며 경우에 따라 12년 동안 지속되거나, 혹은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설치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조사된 관요 중에 구체적인 설치 기간이 파악된 곳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기록을 통해 살펴본 것과 같이 설치 시기가 불규칙한 경우도 확인된다. 현재까지 가마가 10년 정도 운영된 곳은 선동리와 송정리 등 소수 확인될 뿐이며, 오향리나 금사리 가마와 같이 주기가 지켜지지 않고 더욱 짧거나 길게 가마가 운영된 곳도 다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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