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3. 위엄과 권위의 상징, 관요백자
  • 조선 조정의 정책과 양반의 인식
전승창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오례의』 명기조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삽도와 함께 소개되어 있어, 당시 사용하던 자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약 20여 종의 다양한 그릇이 등장하는데, 이 중 ‘주병’은 분청사기 매병이지만, 잔, 반발, 갱접, 찬접은 백자에 서도 발견된다. 같은 해 세상을 떠난 온녕군의 묘에서도 분청사기가 출토되어, 분청사기 모두를 대신할 만큼 백자의 생산과 수요가 급증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백자의 제작과 사용은 증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종직의 『점필재집』을 통해 1442∼1447년 사이 광주, 남원, 고령에서 백자가 제작되었고 1442년 이전부터 공물로 바치기도 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문집에서 이전에 진상되던 백자의 질이 거칠다고 적고 있어 제작 수준이 높지 못하고 수요자의 폭도 넓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백자의 제작과 수요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1447년에는 문소, 휘덕전의 은그릇을 백자로 대신하는 등 신성한 왕실 조상의 혼전에 백자를 사용하고 있어,197) 『세종실록』 권116, 세종 29년 윤4월 7일. 이전과 다른 변화를 짐작케 한다. 백자는 늦어도 1440년대에 들어서면 제작과 수요가 늘어나고 1450년대를 지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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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 주병(酒甁)
『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 주병(酒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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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수요의 증가는 재료인 청화안료와 백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개발과 관리에 대한 조선 조정의 정책도 펼쳐졌다. 청화안료는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回靑)’을 사용하였지만 중국에서도 안료가 일시 고갈되어 구할 수 없게 되자, 1463년부터 1469년 사이 국내에서는 ‘토청(土靑)’을 개발하려 노력하였다. 기록을 보면 경상도 밀양, 의성, 울산, 전라도 강진, 순천에서 경차관이나 관찰사가 직접 구해 바치는 등 백자 장식에 필요한 안료를 찾기 위하여 수년에 걸쳐 노력이 지속되었다.198) 『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 5월 24일 ; 권31, 세조 9년 윤7월 3일 ; 권34, 세조 10년 8월 7일 ; 세조 10년 9월 13일 ; 『예종실록』 권8, 예종 원년 10월 5일.

한편, 1440년대부터 1460년대에 백자 수요가 증가하였지만 양반들의 사적인 백자 사용을 규제하거나 재료인 백토를 관리하지는 않았다. 당시까지는 왕실이 백자제작을 통제 하지 않았다. 그러나 1466년부터 백자의 제작과 사용을 규제하며 왕실과 관청이 백자를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469년 『경국대전』에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자는 장 80에 처하는 등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은 계속되었다. 관요백자의 재료인 백토도 통제하였는데, 1530년 백점토를 이전에는 사현이나 충청도에서 갖다 썼지만, 지금은 양근에서 파다 쓰고 있다고 적고 있어, 16세기에도 백토의 관리는 꾸준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산지를 바꿔가며 백토를 채취하던 사실이 확인된다. 1538년에도 함경도 같은 먼 지역에서도 광주의 백자를 사가니 그 폐를 고치라고 하는 기록이 확인되므로, 관요 백자의 사용 규제가 심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조정이 백자 사용을 규제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양반 사이에서는 백자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고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1440년대부터 양반들의 백자에 대한 선호도와 수요가 증가하는 정황이 문헌기록 곳곳에 나타난다. 1445년 도순찰사 김종서가 고령현에 들러 고령의 백자를 칭찬하고 선물로 바랄만큼 관심이 확대되고 있었다. 또한, 1447년에도 백자가 값진 선물로 주고받을 만큼 지배층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백자의 제작지로 알려진 곳은 전국 몇 곳에 불과하였으며 제작량도 많지 않았다.199) 당시 기록에서 확인되는 전국의 대표적인 백자제작지로 고령, 남원, 광주가 확인된다(『점필재집』, 이존록, 선공사업4). 이후 백자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증가하였는데, 술자리에서 사용하던 술잔을 가져가거나 백자 잔을 선물로 주고받을 만큼 양반 사이에서 백자에 대한 인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시기를 즈음하여 1466년 공사간의 백자 사용과 제작을 금지하였고, 1469년 『경국대전』 형전에서는 신분의 변별을 위하여 청화백자의 사용도 제한하였다. 이와 같이 백자 사용이 금지되자 관심이 고조되어 있던 양반들 사이에서는 생산과 수요가 통제되는 조선백자에서 벗어나 급기야 중국산 청화백자로 관심을 돌리기도 하였다. 1475년에는 밀무역으로 유입된 중국산 청화자기를 사용하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하였고, 이후 1477년까지도 중국산 청화자기 수요 증가와 그로 인한 폐단이 지속되었 다. 사회에 만연한 사치풍조는 귀근, 훈척, 척리, 거상, 부고, 호부 등 사대부가 주류를 이루었고 여염의 백성들까지도 따라하였다. 이러한 사용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의 청화백자 사용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조선 정부는 1498년 청화백자의 사용을 금하고 있음을 거듭 밝히지만 정책대로 사용 규제가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또한, 1537년 6진과 같은 조선의 최북단에서도 광주의 백자를 사용할 정도로 수요는 확대되어 갔다. 왕실의 존엄과 상하 신분의 변별, 그리고 사치풍조의 배격 등을 이유로 사적인 백자 사용을 금하였지만,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왕실문화에 대한 동경과 백자나 청화백자를 통한 과시 욕구가 끊임없이 수요를 만들어냈다. 통제를 통해 독점하려는 정책이나 여기에서 벗어나 백자의 사용을 실현하려는 개인들 모두 조선 초기에 백자가 제작되고 발전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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