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3. 위엄과 권위의 상징, 관요백자
  • 관요백자, 품격과 의식의 발현
전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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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내용’명 대접 파편
백자 ‘내용’명 대접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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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가마터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백자 파편이 출토되었으며, 관요에서 제작된 백자는 전세(傳世)유물로도 다수 전한다. 몇몇 가마터가 발굴되고 자료가 축적되어 백자의 크기, 형태와 변천과정, 장식 등이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가마는 관요설치를 기준으로 이전에 운영된 가마와 이후에 제작활동을 벌인 가마로 구분된다. 관요 설치 이전에 운영된 곳으로 우산리 2호와 17호, 건업리 2호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1440년대에서 1460년대 사이에 백자 발, 접시, 잔과 함께 소수의 마상배, 대발, 호, 병, 제기 등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그릇을 제작하였다. 장식은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당초무늬를 흑상감한 파편도 소수 발견되며, 흙 속에 잡티가 있거나 색이 약간 어두워 회청색이나 회록색을 띠는 백자가 주류이다. 특히, 궁궐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라는 의미의 ‘내용(內用)’명문이 새겨진 파편이 발견되었고, 사옹원(司饔院)이나 사선서(司膳署)의 앞 글자를 의미하는 ‘사(司)’라는 글자를 새긴 예도 있어, 공납용 백자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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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 출토 백자와 청자
관요 출토 백자와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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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운영된 관요는 소수만 발굴되었는데, 도마리 1호, 우산리 9호, 번천리 5호 및 9호가 그곳이다. 순백자를 비롯해 청화백자가 출토되었으며, 이외에 상감백자, 청자가 발견되었고, 중국산 청화백자 파편도 확인되었다. 종류도 발, 접시, 잔, 잔받침, 뚜껑, 합, 마상배, 병, 호, 반, 장군, 향로, 제기, 묘지석 등 다양하지만, 발, 접시, 잔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점은 이전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화형잔, 육각잔, 연적, 세반(洗盤), 편병 등 새로운 종류를 비롯해 양이잔(兩耳盞)이나 잔받침과 같이 금속기를 모본으로 제작한 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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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현(玄)’명 발
백자 ‘현(玄)’명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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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는 관요 설치 이후 왕실과 관청에서 백자의 용도가 분화되고 사용이 더욱 다양해졌던 것을 의미한다. 물론 왕실용 백자의 경우 식생활뿐만 아니라 일부 의식행사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의식용기와 동일시할 만큼 왕실용 백자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굽바닥에 ‘천지현황(天地玄黃)’, ‘별(別)’, ‘좌우(左右)’의 글자를 각각 새기기도 하였는데, 천지현황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사이에 나타나고 별은 추가로 제작한 별번(別燔), 좌우는 16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며 두 개로 구분된 제작 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요백자는 태토의 질, 유색, 굽의 모양, 받침방법, 번법 등에 따라 양질과 조질로 구분되는데, 질의 확연한 분화는 관요백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왕실용 백자는 설백색을 띠며 역삼각형굽에 모래를 받침 재료로 갑발에 넣어 구운 것이 대부분이고, 관청용 백자는 담청색이나 연회색을 띠며 죽절굽에 태토비짐을 받쳐 포개어 구웠다. ‘을축팔월(乙丑八月, 1505)’의 글자를 음각으로 적은 사각봉, ‘임인(壬 寅)’명, ‘가정삼십삼년(嘉靖三十三年)’명 등이 새겨진 묘지석 파편도 출토되었다.

광주에서 제작된 백자는 성격과 종류에 따라 제작 시기별로 크기에 차이가 있다.200) 전승창, 앞의 글, 2007, pp.148∼159. 수량이 가장 많은 발의 경우, 평균 크기를 비교하면 높이 7.3㎝에서 8.8㎝, 입지름 16.0㎝에서 16.6㎝, 굽지름 5.7㎝에서 7.0㎝로 관요에서 더욱 커졌다. 변화는 접시나 잔받침 등 대부분의 종류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므로, 관요에서 다양한 크기의 백자가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형태에도 차이가 있는데, 발, 접시, 잔 등 그릇의 측면이 완연한 곡면으로 변화되고 안바닥이 넓어져 양감이 좋으며, 주둥이 가장자리가 짧게 벌어져 부드럽고 당당한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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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태호
백자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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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특징은 관청용보다 왕실용 백자에서 두드러진다. 이 차이는 사용자, 즉 왕실용과 관청용으로 나누어 제작하는 과정에서부터 구분하였기 때문이며 백자의 크기와 형태, 질은 사용자의 신분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양질과 조질 사이의 차이와는 별개로 시간이 경과하며 왕실용 백자의 형태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발의 경우, 16세기 중반부터 입지름이 약간 작아지고 안바닥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깊어진 오목한 형태도 나타나며, 이후 17세기 중반에는 그 특징이 더욱 완연해진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용자 미감의 차이이거나 제작상의 편의에 따른 점진적인 변화로, 관요 설치 이후 100여 년 이상 오랜 시간이 경과해 나타난 것일 뿐 조선 조정의 정책적인 변화는 아니다. 오히려 발과 같은 동일 기종이 오랜 기간 유사한 형태로 꾸준히 제작된 것은 유교의 통치이념에 따른 왕실백자의 전통과 변화에 대한 보수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발굴 출토품과 전세품 중에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유물을 편년자료라고 하는데, 그 수는 많지 않다. 이 중에 다수를 차지하는 종류가 백자태호와 묘지석이다. 태호는 아기의 태를 담아 외면을 비단으로 감싼 후, 땅 속에 묻어 보관하는 용도의 항아리로 내호와 외호로 구성된다. 뚜껑이 있고 항아리 어깨에 반원형 고리가 4개 정도 부착되어 서로를 끈으로 묶어 고정시킬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유물이 1476년 <백자태호>인데, 뚜껑 윗면에 음각으로 연꽃을 장식하였다. 색깔은 연회색이며 표면을 꼼꼼하게 다듬지 않아 물레 흔적도 남아 있다. 세부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될 뿐, 전체 형태, 비례, 뚜껑의 모양, 고리, 질 등은 1481년과 1485년 태호에서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어, 15세기 말까지 제작 전통이 일정하게 지속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506년 유물에서는 변화가 보이는데, 뚜껑이 납작해져 윗면이 편평해졌고 어깨의 양감이 줄었다. 이 변화는 16세기 말에도 지속되어 1581년 태호에서는 뚜껑이 원반형이고, 외형도 사선에 가까운 정련된 형태로 바뀌었다. 태호는 의식에 사용하던 백자이므로 형태나 크기, 장식 등이 정해진 규식이나 전통에 충실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형태나 기능과 연관된 구조는 지속되지만 전체의 비례나 세부의 표현, 크기, 질 등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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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태호
백자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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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난 사람을 위한 백자가 태호라면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백자가 묘지석이다. 묘지석은 묘주의 행장을 적은 것으로 백자로 제작하여 무덤 앞에 땅을 파고 묻었다. 1456년 <백자청화인천이씨명묘지석>은 청화안료로 행장을 적었는데, 청 화백자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 광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제작지는 알 수 없다. 묘지석과 관련하여 1422년 『산릉제도』에 지석은 길이가 4척 4촌이며, 너비가 3척 4촌, 두께가 4촌 5분인 커다란 장방형의 판형이라고 나타나고, 1474년 『국조오례의』에 지석은 두 개를 만드는데 하나는 다른 하나의 덮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자묘지석도 이러한 규식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01) 『세종실록』 권17, 세종 4년 9월 6일 및 『국조오례의』 권8, 흉례, 대부사서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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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인천이씨명묘지석
백자청화인천이씨명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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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석은 제작 시기별로 특징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1488년 <백자음각서거정묘지석>은 크기가 크고 당당하며 윗면에 바둑판 모양으로 종횡의 선을 미리 긋고 각각의 칸에 맞추어 묘지문을 적은 것이나, 적어 내린 묘지석의 방향이 가로인 점에 차이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음각으로 묘지문을 적은 것인데, 이 유물을 시작으로 1559년 <백자음각한기묘지석>을 비롯해 16세기 중반까지 음각된 묘지문이 즐겨 사용되었다. 그러나 음각기법 이외에 안료를 사용해 묘지문을 적기도 하였는데, 청화와 철화가 있다. 먼저, 철화는 16세기에 간헐적으로 제작되었는데, 1512년 <백자철화조원망묘지석>이 대표적이다.

당시 묘지문의 작성에 음각기법이 주로 사용되었고 16세기 후반에는 청화안료가 유행하여 철안료로 묘주의 행장을 적은 묘지는 처음부터 제작량이 적었다. 철안료를 사용한 묘지문의 구성이나 묘지의 형태, 크기 등은 같은 시기에 제작되던 음각묘지석과 유사하다. 한편, 청화묘지석 역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는 제작량이 적었다. 1456년 <백자청화인천이씨묘지석> 이후 오랜 동안 공백상태를 보이다가 1564년 <백자청화상진묘지석>을 비롯하여 1576년 <백자청화박공묘지석> 등 다수를 제작하였으므로 유물로 본다면 1560년대에 청화안료로 묘지문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관요 설치 이전에는 백자의 제작이나 안료 사용에 통제를 받지 않았지만, 관요 설치 이후 1550년대까지 청화안료의 사용이나 청화백자의 제작이 집중적인 규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묘지문은 주로 음각되었으며, 음각묘지석이 상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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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조원망묘지석
백자철화조원망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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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음각서거정묘지석
백자음각서거정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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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박공묘지석
백자청화박공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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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철화의 경우 청화안료에 비하여 안료 구입이 쉽고 통제가 적어 청화묘지석보다 이른 시기인 1508년부터 등장하였지만 주로 사용되던 기법이 아니며, 청화묘지석이 본격 제작된 이후에도 소수만이 만들어졌다. 묘지석은 크기에도 차이를 보인다. 15세기에는 크기가 큰 편이고 16세기 초에 급격히 작아지기도 하였지만 이후 가로 18∼19㎝, 세로 23∼24㎝, 두께 1∼2㎝ 정도의 묘지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16세기 말에는 두께가 1㎝ 정도로 얇게 만들어졌다. 묘지석은 부장용품으로 형태나 크기의 변화가 매우 적을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시간이 경과하며 서서히 전체 크기와 두께가 달라지는 것으로 확인된다.202) 전승창, 앞의 글, 2007, pp.112∼115.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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