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4. 중국백자의 영향과 관요백자의 새로운 선택
  • 문헌기록과 출토품으로 본 중국백자
전승창

중국의 자기가 조선에 유입되는 경로는 중국에서 직접 반입되거나,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었다.207) 전승창, 「조선 전기의 백자 전접시 고찰」, 『호암미술관 연구논문집』 2, 삼성문화재단, 1997, pp.105∼107. 조선은 두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신 왕래와 무역을 하였고 국경을 드나드는 물품 중에는 자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자는 중국에서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하사하거나 사신이 진상하였으며, 전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수량을 차지한다. 일본은 조선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각종 물품을 진상하였는데, 이들 물건 중에 자기가 있었 다. 당시 일본은 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 필요한 것은 중국과 교역을 통해 충당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조선에 바친 청자와 백자는 중국에서 구입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에 유입된 자기는 중국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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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당초문접시 파편
백자청화당초문접시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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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오례의』 청화운룡백자주해
『세종실록오례의』 청화운룡백자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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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자기의 대부분은 궁중에서 사용되었으며, 관요백자의 종류나 형태, 장식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관요백자의 제작지였던 도마리, 우산리, 번천리 가마터에서 중국산 청화백자 파편들이 출토되었고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관요백자도 전하고 있다. 조선에 유입된 중국 자기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잘 나타난다. 관련 기록은 모두 31건인데, 중국에서 유입된 횟수는 총 19건이고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경우도 12건에 이른다. 대부분 백자와 청자로 확인되지만 분색사기, 주기, 자완, 사발과 같이 막연하게 표기된 경우는 어떤 종류인지 추정이 어렵다.

당시 중국은 경덕진에서 백자를 활발하게 제작하였고 용천에서는 청자를 만들어 내수 혹은 수출용으로 사용하였으므로 기록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자기는 완을 비롯해 종, 발, 대접, 병, 반, 분, 잔, 향로, 주해, 주주 등 여러 종류였으며 형태나 크기, 장식 등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430년 황제가 보낸 <청화운룡백자주해>의 경우는, 유입시기, 명칭, 운룡장식, 종류로 보아 『세종실록오례의』에 수록된 <백자청화주해>로 알려져 있다.208) 『세종실록오례의』 에 수록된 <백자청화주해>의 제작지에 대하여 ‘명나라’라는 주장과 ‘조선’이라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정양모는 국내에서 제작된 청화백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정양모, 「조선백자 청화백자」, 『한국미술사의 현황』, 예경, 1992, pp.403∼404), 강경숙도 국내산으로 추정하고 있다(강경숙, 「분원성립에 따른 분청사기 편년 및 청화백자 개시 문제」,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pp.1494∼1495). 김영원 역시 1430년 조선에 유입된 <청화운룡 백자주해>를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97).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윤용이는 명나라 청화백자로 주장하며(윤용이, 「조선 초기도자의 양상」,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특별전도록,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93, p.80), 윤효정도 중국산으로 추정하고 있다(윤효정, 「조선 15∼16세기 청화백자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17). 필자는 첫째 <백자청화주해>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유물이 알려져 있지 않고, 둘째 대좌와 하나의 세트를 이루며 받침 위에 올려놓고 그림을 그릴 만큼 애지중지하였던 점, 셋째 유입시기와 유물의 명칭이 유사한 점, 넷째 운룡장식이 공통의 소재로 등장하고 기종이 동일하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1430년 중국 황제로부터 받았던 청화백자를 『세종실록오례의』 에 수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중국산 (청화)백자의 유입이 세종연간(1418∼1450)에 집중되고, 문종(재위 1450∼1452)의 즉위년인 1450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확인될 뿐 이후에는 뚜렷한 자기 교류가 나타나지 않는다. 점차 중국 자기의 유입이 감소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세조연간(1455∼1468)에 관요 설치를 자극하게 되고 전국에서 청화안료를 찾으려는 노력의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관요 초기에 제작된 (청화)백자 중에는 중국 자기와 유사한 형태를 만들거나 표면을 장식하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관요 운영이 활발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사이에는 중국산(청화) 백자가 조선에 공식적으로 유입되지 않았으므로, 이 시기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청화백자의 영향이 나타날 수 있을지는 의문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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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당초문발
백자청화당초문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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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와 함께 전국에 분포한 소비유적지에서 중국산(청화) 백자 파편이 발견된다. 경기도 광주 도마리, 우산리, 번천리, 관음리, 대쌍령리에 위치한 관요에서 중국 백자가 출토되었는데, 가마는 모두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사이에 운영된 곳이다. 관요에서 중국산 청화백자가 확인됨에 따라, 관요백자의 제작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출토된 중국산 청화백자와 동일한 그림이 그려진 관요백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중국산 청화백자는 소비유적지에서도 발견되어, 실생활에서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서울시 중구 을지로 및 장교동을 비롯해,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용인 임진산성, 충청북도 청주 용정동, 경상남도 구미 진평 등이 대표적인 출토 유적이다.209) 국립대구박물관, 『우리 문화 속의 중국도자기』 2004, pp.112∼119 ; 김영원, 「한반도출토 중국도자」, 『우리 문화속의 중국도자기』, 국립대구박물관, 2004, pp.146∼147. 을지로에서는 접시·완·잔·대접이 장교동에서는 완·대접이 출토된 것을 비롯해, 회암사지에서 청화백자반·완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청주 용정동 유적에서 발, 경기도 임진산성에서 범자와 ‘대명선덕년제’(1426∼1435), ‘장춘가기’라는 문자가 적힌 청화백자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관요나 소비유적지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는 경덕진 민요 혹은 주변의 제작지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낮은 예들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15세기 중반까지 경덕진 관요품이 공식 교류를 통해 유입되다가, 그 이후에는 밀무역 혹은 사무역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경덕진 민요산 청화백자가 조선에 들어왔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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