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 04. 중국백자의 영향과 관요백자의 새로운 선택
  • 중국산 청화백자의 영향과 변용
전승창

명나라 청화백자의 장식은 관요백자에도 나타나는데, 대접, 완, 잔, 잔받침, 병, 항아리에서 유사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표면에 그려진 그림은 용, 말, 보상당초, 국화절지, 연화절지가 대표적이다. 이 중 현재까지 용을 장식한 관요백자는 우산리에서 출토된 호의 파편과 <백자청화운룡문병> 두 점이 있고 여기에 더하여 1430년 황제가 보낸 <청화운룡백자주해>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세종실록오례의』에 남아 있다.

용은 중국 선덕연간(1426∼1435)에 만들어진 <백자청화운룡문선덕년제명호>의 모습과 매우 닮아 관요백자의 장식이 15세기 초반 에 만들어진 중국산 청화백자의 그림을 모본으로 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말을 그린 경우도 유사한데, 번천리에서 출토된 파편의 그림은 명나라 초기 청화백자의 장식과 매우 비슷하다. 파편이 출토된 번천리 가마는 16세기 중반에 운영되던 곳이지만, 장식은 명나라 초기에 제작된 청화백자 모본이 지속되고 있어 주목된다. 한편, 백자의 어깨나 저부, 문양 사이의 빈 공간도 도식적인 장식으로 채웠는데, 구름, 구갑, 격자, 칠보, 여의두, 연화절지, 보상화, 모란덩굴, 연잎, 꽃잎, 문자가 대표적이다. 이 중에 꽃잎은 <백자청화매죽문호>의 어깨와 저부에 반복적으로 나열하듯 장식되었는데, 줄기로 보이는 선이 있고 좌우에 꽃 문양을 두었다. 이와 유사한 장식 표현은 명나라 초기에 제작된 주전자, 호, 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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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운룡문병
백자청화운룡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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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선덕년제명운룡문호
백자청화선덕년제명운룡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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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백자와 중국산 청화백자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도 발견된다. 먼저 그릇의 종류에 따른 장식의 선택에서 구별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용문양은 호, 완, 접시에 등장하지만 조선에서는 병, 호와 같은 특정한 그릇에만 장식되어, 중국의 예를 철저하게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관요백자의 장식은 16세기가 되면 도식적인 문양이 줄어들고 회화장식 위주로 변화된다. 더불어 시(詩)나 포도 같은 새로운 소재가 등장하여 변화와 개성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중국백자의 영향은 일부이며 그마저도 다양하게 응용하여 채택하였다. 다음으로, 백자에 장식된 그림의 유행시기에서도 차이를 꼽을 수 있다.

관요백자의 그림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그려진 것인데, 이와 유사한 장식의 중국 청화백자는 15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유물이 다수였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중국의 청화장식이 관요백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출토품에는 상당한 시차가 확인되는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가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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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말문뚜껑 파편
백자청화말문뚜껑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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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관요나 소비 유적지에서 출토된 중국산 청화백자는 발과 접시가 대부분이다. 접시의 경우, 먼저 16세기 중반에 운영된 번천리 가마 출토품 중에는 크기, 비례, 주둥이 가장자리 및 측면의 곡선, 편평한 안바닥 등 중국백자 접시와 거의 동일한 예가 전한다. 또한, 백자발도, 관요백자와 명나라 백자 사이에 차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유물이 있다. 이와 같이 관요백자 일부에서는 명나라(청화) 백자의 영향이 뚜렷히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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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포도문 받침
백자청화포도문 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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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매죽문호
백자청화매죽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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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이하게도 시기 차이가 큰 15세기 전반 선덕 연간을 전후해 만든 중국 백자를 모본으로 한 듯한 장식이 대부분이고 그릇의 종류도 제한적이다. 1493년 사옹원제조 유자광이 관요인 와부를 중국식 입부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관요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축조해 사용하였던 것처럼 관요백자의 모든 종류와 형태에 중국백자의 특징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잔이나 잔받침과 같이 금속기를 본 뜬 예와 편병, 연적, 제기 등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형태도 만들어졌다. 나아가 조선의 지배층 사이에서 회자되던 시를 백자에 적기도 하고 회화에서 유행하던 포도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이처럼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선별적 수용과 창조적 응용력은 탄탄한 요업 체계를 갖춘 관요의 역량을 토대로 한 조선의 문화적 자부심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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