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1. 조선, 그리고 후기 백자
  • 부와 품격의 상징
방병선

17세기 말 분원 장인들에게 사번이 허용되면서 분원 백자는 왕실 그릇뿐 아니라 보다 상품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용봉문(龍鳳文) 등이 시문된 왕실 표상의 그릇을 제외하고 누구라도 경제력만 갖추면 있으면 왕실이 사용하던 최고급의 청화백자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릇은 신분과 부(富)의 상징이자 왕실을 비롯한 다양한 수요층의 품격과 미적 취향이 반영된 정신성의 표상으로 자리하였다.

18세기 들어서는 이전에 비해 청화백자와 같은 고급 그릇에 대해 광범위한 수요층이 형성되었다. 또한, 경제적인 여유와 사회 분위기의 변화 등으로 수요층들이 장식적인 그릇 사용에 보다 적극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곧 백자의 양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왕실 이외 가장 큰 수요층으로 자리한 문인 사대부층은 ‘학예일치(學藝一致) 사상’에 따라 자신들의 미적 취향이 그릇에 반영되길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회화적인 산수문이나 화훼문 등에 시를 적어 넣은 문인 취향의 자기 생산이 활발해졌다. 절제된 청화문양과 순결한 유백색의 유색(釉色)은 이 시기 문인들의 서정성을 잘 대변해 주었다. 또한, 영조 후반 이후 양반의 수가 증가하면서 문인들의 전유물인 문방구류의 생산이 증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형에 있어서도 달항아리 등 조선 고유의 것이 있는가 하면, 각형(角形) 기형 등 중국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기형도 등장하였다.212) 방병선, 『조선 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pp.286∼325.

한편, 왕실 전유물이던 청화백자를 일반 사대부뿐 아니라 부를 갖춘 중인 계급들까지도 널리 사용하면서 그릇의 상하 구분은 애매해지게 되었다.213) 『승정원일기』 1105책, 영조 30년 4월 29일.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지배계급으로서는 이러한 현상을 결코 묵과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복식이나 가옥과 마찬가지 로 그릇은 신분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도구로 규제와 간섭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더구나 장식이 과다한 청화백자의 제작에는 적지 않은 재물이 소요되므로, 청화백자의 제작은 사회 전반적인 사치 풍조를 염려한 임금들에 의해 제재를 받기에 이른다. 급기야 영조 30년(1754)에는 사회 전반적인 사치풍조를 염려한 나머지 청화백자 금지령이 내려지게 되었다.214) 『영조실록』 권82, 영조 30년 7월 갑오. 그러나 영조의 금지 조치는 사회 전반에 퍼진 사치풍조와 청화백자 수요층이 강고하게 자리한 탓인지 실제 출토된 자료 등을 보면 별로 실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정조 역시 도자기뿐 아니라 청 문물의 유입과 사치품의 만연에 따른 사회풍조를 몹시 염려하였기에 보다 통제가 가능한 백자 제작에 직접적인 금제 조치를 내렸다.215) 『정조실록』 권48, 정조 22년 3월 28일 임진. 사대부는 마땅 검소한 그릇을 사용하고 사치품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임금 스스로 화려한 청화백자보다는 아무 문양이 없고 질이 떨어지는 보통 그릇을 사용하여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216) 『순조실록』 권32, 순조 32년 9월 15일. 또한, 정조는 청으로부터 들어오는 그릇들을 천박한 상업문화의 일단으로 생각하였는데 자기는 사대부의 그릇으로 검소한 면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217) 이태진, 「정조」, 『한국사시민강좌』 13, 일조각, 1993, pp.61∼85. 영·정조 시기에는 이처럼 도자기뿐 아니라 복식과 머리모양에 이르기까지 금제 조치가 많았는데 이는 역으로 소비에 있어 사치가 심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19세기에 들어서면 세도정치에 참여하거나 부를 축적한 중인(中人), 상인(商人)계급은, 서울을 중심으로 경화사족(京華士族)을 형성하여 사치스러우면서 활발한 분위기를 이끌어나갔다.218) 유봉학, 「경화사족 지식인의 생활과 사상」, 『조선 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1998, pp.141∼194. 이들은 경제적인 힘으로 신분상승을 꾀하거나 골동과 서화수장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시대풍조에 편승하여 특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중국 자기를 선호하였으며 이들 그릇을 모방하거나 호사스럽고 화려한 장식의 백자를 선호하였다.

왕실과 경화사족 등이 19세기 백자의 주 수요층으로 자리하면서 전 시대 문인 취향의 고아한 품격과 격식보다는 중국 자기를 모방한 장식성이 강한 자기가 크게 유행하였다. 여기에는 잦은 연행(燕行)에 따른 청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청조 고증학(淸朝考證學)의 유행, 청 문물의 유입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중국에 가서 직접 중국 그릇의 사용 실태를 접하거나 조선에 유입된 중국 그릇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이들에게 19세기 조선 그릇은 장식과 제작 기술적인 면에서 중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수요층의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조선 백자의 수요층들은 외국 그릇에 더욱 경도되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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