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2. 잿빛 백자에 철화용이 날고
  • 고난 극복과 분원제도의 정비
방병선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상황은 피폐, 그 자체였다.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신분제의 동요로 나라는 마치 벌거벗은 민둥산 같은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궁궐에서의 그릇 사용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의례(儀禮) 시 사용되는 은기나 유기(鍮器)들이 전쟁으로 거의 파손되어 사용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종묘 제향에 사용할 유기와 은기들을 사기로 대체하였고, 이를 사신 접대 등의 국빈 대접용으로 사용하였다.219) 『선조실록』 권146, 35년 2월 14일 정축.

신분에 따른 그릇 사용도 해이해져서 광해군 8년(1615)에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심지어 민간에서 대여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이전의 규정대로 대전에서는 백자를, 동궁(東宮)에서는 청자를, 사신 접대를 담당한 예빈시(禮賓寺)에서는 청홍아리화(靑紅阿里畵)를 사용토록 재차 규정하였다.220) 1555년 편찬된 『경국대전주해』 에는 왕과 왕세자 등의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그릇을 달리 규정하였다( 『경국대전 주해』 후집 하, 형전 및 『광해군일기』 권102, 8년 4월 23일 임술). 청홍아리화는 청화백자와 같은 채색장식이 가미된 그릇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17세기 초반 광주 분원의 탄벌리와 학동리 가마 등에서는 청화백자가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221) 장기훈, 「조선시대 17세기 백자의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p.65∼73. 따라서 조선 전기처럼 신분과 경우에 맞게 그릇을 사용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시 주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222)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일반 사대부들에게도 청화백자보다 품질이 약간 떨어지는 常白磁 사용을 허락하고 있어서 왕실 전용이었던 백자를 사대부들도 아무런 규제 없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청자는 청자 태토에 백자 유약을 시유하거나,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시유한 것으로 조선 전기부터 꾸준히 제작되었지만 그 수량은 많지 않았다. 특히, 백자와 달리 청색을 내는 특성 탓에 왕실 가운데서도 동궁에서 애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223) 김영미, 「조선시대 관요 청자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pp.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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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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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후 경제적 궁핍은 백자, 특히 청화백자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싼 가격으로 북경에서 사와야 하는 청화 안료는 상대적으로 청화백자 제작에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청화 안료의 구입이 용이치 않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궁여지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였다.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자 철화백자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고 효종대 이후에는 반청(反淸)감정까지 더해지면서 청화백자 생산은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광해군 10년(1617) 북경에서 청화안료를 사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바친 파손된 청화백자용문(龍文)항아리나 가화(假畵)를 각종 연례에 사용하였다.224) 『광해군일기』 권127, 광해군 10년 윤4월 3일 신유. 여기서 가화란 초벌구이한 항아리에 먹이나 안료로 용과 구름 등을 그린 후 그대로 사용한 항아리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연간의 기록에 가화 용항아리를 운반할 때, 문양이 뭉개지고 닳았다는 기록이 있어 위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225) 『승정원일기』 14책, 인조 4년 윤6월 13일. 이밖에도 아예 중국에서 청화백자용문항아리 한 쌍을 사 오기도 하였다.226) 『승정원일기』 14책, 인조 4년 윤6월 13일. 광해군 14년(1621)에는 청화백자가 더욱 귀해서 대신들에게 가지고 있는 청화백자 용항아리를 바치도록 권유하여 상까지 내렸다.227) 『광해군일기』 권174, 광해군 14년 2월 6일. 인조 2년(1624)에도 역관 등이 북경에서 청화안료를 사오지 못해 청화백자 용항아리를 제작할 수 없게 되자 가화(假畵)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계속 벗겨지자 결국 석간주로 용을 그려 사신 접대용으로 사용하였다.228) 『승정원일기』 43책, 인조 12년 5월 18일.

석간주(石間朱)란 산화철이 주원료인 광물성 안료로 국내에서는 여러 곳에서 출토되어 구하기 용이하였다. 초벌구이한 백자에 석간주로 문양을 그리고 재벌구이를 하면 주로 갈색이나 적갈색을 띠어 푸른 청화에 비해서는 하얀 바탕을 고려할 때 산뜻한 느낌이 줄어든다. 게다가 안료의 휘발성이 강해서 농담 조절과 붓질이 어렵고, 가마에서 소성 시 안료의 화학적 상태가 불안정하여 청화와 같은 선명한 문양을 얻기는 매우 어려운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석간주를 안료로 사용한 철화백자는 거칠지만 대담한 표현과 회백색의 색상으로 이 시대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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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
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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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 경제적 어려움은 왕실 전용 그릇 공장인 사옹원 분원(分院) 운영과 그릇 생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 어려움은 물력의 부족으로 이어져 성리학의 국가인 조선이 가장 중요시하던 제기 마저도 제대로 제작하지 못하였다.229) 『승정원일기』 29책, 인조 8년 2월 19일. 이에 내섬시(內贍寺)를 제외한 각사(各司)의 그릇을 전부 도기(陶器)로 대체 사용토록 하였다.230) 『승정원일기』 35책, 인조 10년 3월 3일. 정묘호란 직후인 인조 6년(1628)과231) 『승정원일기』 25책, 인조 7년 3월 21일. 병자호란 직후인 인조 15년(1637), 인조 24년(1646)에는 물력을 아끼고 민폐를 줄이기 위해 1년간 분원에서 장인을 모집하지 않고 아예 백자 제작을 중지하기도 하였다.232) 『승정원일기』 58책, 인조 15년 윤4월 18일조 ; 93책, 인조 24년 1월 11일. 그릇의 운반도 불안정해서 인조 26년(1648)에는 진상(進上) 그릇을 궁궐로 운송하는 도중에 귀중한 용항아리뿐 아니라 전체 상납 그릇의 1/4가량이나 파손되는 일이 발생하였다.233) 『승정원일기』 101책, 인조 26년 윤3월 15일.

경영의 어려움과 신분제의 동요로 분원 사기장의 모집과 운용은 더욱 힘들어졌다. 원래 분원 사기장의 정원은 380명으로234) 1543년 편찬된 『대전후속록』 이후 사기장인은 그 업을 계속 자식들이 잇도록 하였다(『대전후속록』 권6, 「공전」). 전국의 사기장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일하였고, 분원에 오지 않은 외방(外方) 사기장들은 세금으로 가포(價布)를 바쳤다. 외방사기장 총수(總數)가 원래는 1,140명이었으나 전란 이후 그 수가 점차 줄어들어 821명에 불과하였다.235) 『승정원일기』 7책, 인조 3년 7월 2일. 장포를 바치는 외방장인들이 장포를 바치지 않거나, 분원에 들어와 일해야 할 장인도 힘든 노역을 피해 상대적으로 일하기 쉬운 다른 군역(軍役)을 택해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236) 『승정원일기』 4책, 인조 3년 2월 14일 ; 23책, 인조 6년 10월 14일 ; 36책, 인조 10년 4월 10일. 이에 분원의 백자 생산이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원에서 사용하는 백토는 산지의 백성들이 산비탈에 올라가 바위 덩어리 백토를 캐서 운반해 와야 하였고, 그 대가로 노역을 지불받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노임 지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인조연간 원주토의 경우 제때에 백토 채굴이 안 되었고,237) 『승정원일기』 53책, 인조 14년 9월 5일. 효종 때에도 백토 채굴에 따른 백성들의 고초가 거듭 보고되었다.238) 『비변사등록』 16책, 효종 4년 11월 30일. 이 시기 사용된 백토 산출지로는 황해도 곡산, 강원도 원주, 충청도 서산, 평안도 선천, 경상도 경주 등이 있었다.239) 『승정원일기』 5책, 인조 3년 3월 21일 ; 53책, 인조 14년 9월 5일 ; 84책, 인조 21년 2월 18일 ; 104책, 인조 27년 2월 2일 ; 129책, 효종 4년 11월 30일 ; 155책, 효종 10년 윤3월 13일 ; 162책, 현종 원년 6월 12일 ; 220책, 현종 11년 8월 12일 ; 238책, 현종 15년 3월 8일 ; 『비변사등록』 17책, 효종 4년 11월 30일. 전국 각지의 태토 중에서도 이들 지역의 것이 백자 제작에 가장 적합하여 왕실용 그릇 생산에 주로 사용되었다.

17세기 후반인 숙종연간에 접어들면서는 정치, 경제적 안정에 힘입어 분원제도의 정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전란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분원을 경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번(私燔)의 허용이었다. 사번이란 왕실용 그릇을 진상하고 남은 그릇을 분원 장인들이 생계를 위해 시장이나 민간에 판매하는 것을 지칭한다. 원래 조선 전기부터 분원의 장인들은 암암리에 사번을 해왔으나 왕실 종친이나 고관대작들의 묘지 제작 정도의 적은 양이었고 그나마 사옹원 제조인 종 친들이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이어서 장인들의 생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240) 『승정원일기』 262책, 숙종 3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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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백자 박증구 묘지명(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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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3년(1700)에는 기근이 심해지고 장인들의 고통이 더욱 극심해지자 정부는 아예 공식적으로 사번을 허용하였다.241) 『승정원일기』 370책, 숙종 23년 윤3월 2일. 이에 분원 장인들은 생계의 고통을 덜면서 왕실뿐 아니라 새로운 수요층으로 등장한 문인의 취향에 맞는 자기 제작에 점차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사번은 향후 청화백자와 같은 고급 그릇들의 수요층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데, 주로 갑발(匣鉢)에 넣어 굽는 갑기와 청화백자가 사번의 주류를 이루었다.242) 『승정원일기』 396책, 숙종 27년 3월 23일.

숙종연간에도 광주 분원에서 사용하는 백자 원료는 전국에 걸쳐 다양하게 채취되었다.243) 『비변사등록』 44책, 숙종 16년 10월 28일. 원료를 캐고, 운반할 때는 사옹원의 하급 관리인 낭청(郎廳)이나 장인 중 우두머리인 변수(邊首)가 파견되어 채굴의 철저함을 기하였으며 실험을 거쳐 최고의 태토를 선별하였다.244) 『승정원일기』 367책, 숙종 22년 9월 6일 ; 371책, 숙종 23년 4월 16일. 태토를 운반할 때는 원거리인 선천토(宣川土)와 경주토는 그곳에서 수비(水飛)하여 적당한 크기로 나누어 분원까지 운송하게 하였다.245) 『승정원일기』 220책, 숙종 8년 8월 9일. 운송은 인근 읍에서 맡도록 하였고 최종적으로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분원까지 운반하였다. 가마 축조 및 갑발용 흙과 유약 원료인 나무 재도 동일한 방식으로 굴취·운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46) 『승정원일기』 372책, 숙종 23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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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리 가마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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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분원은 초벌구이와 재벌구이에 소용되는 막대한 땔감 조달로 대략 십 년 정도에 한 번씩 다른 지역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247) 『승정원일기』 255책, 숙종 2년 8월 1일. 이동 시 새로운 작업장 및 숙소의 건설과 필요한 자재의 운반은 모두 장인들의 몫이어서 분원의 이동은 장인들에게 엄청난 고역이었다. 또한, 분원 이전에 막대한 비용이 들며, 게다가 이전해 갈 장소에 광주 백성들이 들어와 화전(火田) 농사를 짓는 일이 빈번해졌다. 따라서 차라리 분원을 고정시키고 땔감을 운반하는 합리적인 방안이 고려되었다.248) 『승정원일기』 370책, 숙종 23년 윤3월 12일.

한편, 이 시기에 지방 가마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는데 수요층의 증가와 상품 경제의 확산으로 지방에서도 백자 수요가 증대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발굴된 지방 가마 중에서는 당시의 제작기술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 몇몇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장성 대도리 가마는249) 목포대학교 박물관·장성군, 『장성 대도리 가마유적』, 1995. 가마 바닥이 거의 수평에 가깝고 굴뚝부로 갈수록 넓어지는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 길이는 23.5m에 평균 너비 2.8미터로 마지막 칸은 초벌칸으로 최대 너비가 3m에 달한다. 이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가마 형태이다.

다음 부여 갓점골 가마는 길이 19.6m, 너비 1.73∼2.25m로 너비는 장성 대도리에 비해 좁으며 경사도는 약 17도를 이룬다. 갓점골 가마는 불창 기둥과 기둥 위 격벽 설치의 흔적을 비롯해서 각 칸이 계단을 이루는 등 좀 더 반도염식(半倒炎式) 가마에 가깝게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250)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대전지방국토관리청, 『부여 정각리 갓점골 유적』, 2002. 위와 같은 17세기 지방 가마의 가마 구조를 통해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분원 가마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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