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2. 잿빛 백자에 철화용이 날고
  • 철화백자에 나타난 새로운 전범(典範)
방병선

17세기 분원은, 발굴 수습된 편년자료를 통해 탄벌리를 거쳐 상림리(1631∼1636)와 선동리(1640∼1649), 효종 연간에 송정리(1649∼1653), 현종과 숙종 초반에 걸쳐 신대리(1665∼1676), 지월리(1677∼1687), 궁평리, 관음리(1690년대)를 거쳐 숙종 43년(1717)에는 실촌면 오양동으로 이전한 것을 알 수 있다.251) 『승정원일기』 528책, 경종 즉위년 12월 17일.

이들 관요의 출토품을 보면 먼저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더 이상 청자가 보이지 않아 청자 제작이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전기 세자(世子)가 청자를 사용한다는 규정이 변화된 것을 의미하며 왕과 왕세자의 그릇 사용에 있어 이전과 다른 규범이 적용되었거나 엄격한 구분이 사라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다음 청화백자의 출토는 극히 적은 반면 철화백자는 1630년대 상림리 가마부터 등장하여 17세기 중·후반에 걸쳐 꾸준히 출토되 었다. 이는 조선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간주를 사용하여 용문 항아리 등을 제작한 기록과도 일치한다.252) 『승정원일기』 43책, 인조 12년 5월 18일.

세 번째로 백자의 굽 안에 음각으로 간지(干支)에다 좌(左) 또는 우(右), 혹은 숫자를 새진 간지명 자기가 1600년대의 탄벌리 가마에서 1670년대의 신대리 가마에 이르는 시기에 출토되었다.253) 윤용이, 「조선시대분원의 성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고고미술』 149·151, 1981, pp.22∼44, 46∼58 ; 정양모, 「경기도 광주분원 요지에 대한 편년적 고찰」, 『한국백자도요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pp.11∼39. 간지를 새기는 것은 그릇 유통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중간 사취 등의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모든 그릇에 간지가 새겨진 것이 아니고 주로 완과 발의 일부에만 존재하므로 관련 자료의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끝으로 당시의 어려운 분원 상황을 반영하듯 원료의 정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철분이 많이 섞인 회백색의 백자가 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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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리 가마 출토 간지명 백자편
송정리 가마 출토 간지명 백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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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 백자의 조형은 관요 중 1640년대 선동리 출토품을 비롯해서254)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한국도로공사, 『광주조선백자요지발굴조사보고-번천리 5호·선동리 2·3호』, 1986. 여러 가마 출토품을 비교하면 대강의 윤곽을 알 수 있다. 먼저 항아리는 둥그런 단지 형태와 키가 큰 항아리로 구분된다. 단지는 몸통을 약간 눌러놓은 주판알 같은 타원형 형태로 이전에 비해 크기가 커지고 굽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오목굽으로 바뀌었다. 구연부는 45도 각도로 밖으로 벌어진 형태와 밖으로 벌어졌다가 다시 안으로 꺾여서 향하는 다이아몬드 형태, 수직으로 직립하는 형태 등 대개 세 가지이다.

특히, 단지와 같은 둥그런 항아리는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굽과 구연부, 최대 지름과 높이가 유사한 이른바 달항아리로 바뀌어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항아리로 자리 잡게 된다. 달항아리는 이전 시기 항아리보다 몸집이 훨씬 커져서 상하 몸통을 별도로 만들어 접합하여 제작하였다. 달항아리의 용도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소형의 경우는 음식 저장용으로, 대형의 경우는 의식용 화준이나 감상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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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달항아리
백자달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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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조선 전기 팽만한 형태에서 점차 가늘고 긴 날씬한 형태로 바뀌었다. 상대적으로 목 부위가 길게 변화하면서 조선 후기 병의 전형을 보여준다.

접시는 굽을 기준으로 하면 4종류로 나눌 수 있는 데, V자형의 높은 굽과 낮은 굽, U자형의 넓은 굽, 안으로 파진 오목굽 등이 제작되었다. 특히, 오목 굽과 높은 굽은 이 시기 크게 유행하였다.255) 정양모, 앞의 글, pp.19∼24. 이들 거의가 가마에서 번조 시에는 조선 전기 태토를 빚어서 받침으로 사용하였 던 것과 달리 모래를 받침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외반된 구연부와 안바닥에 음각이 있으며 굽이 안으로 굽은 형태에서 점차 안바닥에 음각이 사라진 수직굽의 형태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잔과 완도 점차 안 바닥에 둥근 음각이 있던 것에서 음각이 사라지는 형태가 주를 이루었다.

문양은 관요 출토품과 전세품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철화백자가 유행하였는데, 청화백자와 달리 안료가 잘 번지고 붓이 잘 나가지 않아 농담 표현이 쉽지 않았다. 후대 영조가 이 시기 철화백자에 대해 “물력(物力)이 부족하여 비록 색이 일정치 않고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사대부의 검소함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한 것을 보아도 철화백자의 문양 표현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256) 『승정원일기』 1109책, 영조 30년 7월 17일. 이 시기 철화백자는 휘발성이 강한 안료로 인해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으나 이를 검소함의 표상으로 여겼던 수요층의 사상과 미감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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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시명전접시
철화백자시명전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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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 문양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와 파격을 보인 것은 용문양이었다. 용은 말 그대로 왕실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교하고 섬세하게 표현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17세기 철화백자에 그려진 용은 정교하고 엄격한 모습부터 윤곽선만으로 간략하게 그려져 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까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철화백자의 용의 목은 마치 커다란 스카프를 두른 듯한 형태로 몸통으로 연결된다. 등의 가시는 작고 가늘며 비늘은 촘촘하고 정교하게 시문되었다. 또한, 여의두형 구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훨씬 더 정교하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릇의 형태는 구연부가 직립하고 둥근 어깨와 비스듬하게 굽까지 연결된 윤곽선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용문양은 일부 과장된 몸짓과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상하 종속문 사이에 정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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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
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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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와 상반된 모습의 용이 대략 17세기 중·후반인 숙종 이후에 등장한다. 철화백자운룡문달항아리는 항아리의 가로, 세로의 길이가 거의 같아 마치 둥근 보름달을 연상시키는 달항아리이다. 종속문은 생략되고 오직 용과 신속하게 윤곽선만으로 그려진 구름만이 항아리 가득 포치해 있다. 커다란 타원을 그리며 꺾어진 목과 아동만화의 한 장면처럼 허공에 떠 있는 한쪽 눈, 정교함을 찾아볼 수 없는 비늘 채색, 천진난만하게 앞 이빨을 다 드러낸 표현 등은 이 시기 왕릉의 석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서 시대 양식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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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
철화백자운룡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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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용항아리는 왕실뿐 아니라 민간에도 유통되면서 보다 양식화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기도 일대 가마에서도 익살맞은 운룡문이 커다란 철화백자항아리에 그려진 것이 출토되어 지방에서도 사번(私燔)으로 유통되었던 것 같다.

한편, 용에서 보이는 만화 같은 이미지는 호랑이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시대 철화백자호로문호(鐵畵白磁虎鷺文壺)에는 무시무시하였던 호랑이가 천진난만하게 묘사되었다. 호랑이는 이전부터 벽사의 의미로 궁궐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세화(歲畵)와 문배(門排) 그림으로 크게 유행하였지만 도자기에는 이 시기 들어 처음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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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호로문항아리
철화백자호로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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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매죽문항아리
철화백자매죽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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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처럼 양식화된 용이나 호랑이 문양이 17세기 철화백자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식화된 문양들은 주로 종속문이 없는 그릇에 나타난다. 이들 그릇들은 궁궐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나 민간의 주문품일 가능성이 크다.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용문양의 그릇들이 왕실의 상징이 아니라 벽사와 감상용, 혹은 민간 신앙의 차원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양식화되었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다.257) 홍선표, 「조선 후기 기복호사 풍조의 만연과 민화의 범람」, 『반갑다 우리 민화』, 서울역사박물관, 2004, pp.224∼229 ; 정병모, 「조선민화론」, 『반갑다 우리 민화』, pp.238∼239.

한편, 문인을 상징하는 매화와 대나무의 표현에서는 당대 화풍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에 나타난 매죽문이나 송죽문이 당대 화풍을 충실히 따랐던 것처럼 17세기 철화백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17세기 전반의 경우 매화문의 구도는 중앙을 비워 입체감을 강조하였고 반원을 그리듯 굽어 올라 간 가지, 부러진 굵은 줄기와 과장된 옹이가 표현되어 17세기 전반의 화풍과 유사하다.258) 이선옥, 『조선시대 매화도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4, pp.68∼69. 또한, 대나무의 죽절과 죽엽 등에 나타난 구도와 강렬한 명암대비, 묘법 등은 선조 연간 묵죽화의 대가였던 탄은(灘隱) 이 정(李霆, 1554∼1626)의 묵죽도와 유사하다.259) 백인산, 『조선시대 묵죽화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pp.108∼112.

반면 17세기 후반에는 매화 잎을 윤곽선으로 형식적으로 처리하고 가지는 굵게 채색하였다. 뒷면의 대나무는 산만하게 3갈래로 갈라진 잎을 거칠게 표현하여 화풍으로는 17세기 후반 허목, 김세록(金世祿, 1601∼1689), 이징 등의 대나무 화풍과 가깝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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