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2. 잿빛 백자에 철화용이 날고
  • 왜관 다완 - 한·일 공동 프로젝트
방병선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이라는 혹독한 전쟁을 치렀지만 일본의 강력한 요청으로 양국간의 교류는 지속되었는데, 특히, 이 시기 조선과 일본 간의 도자 교류는 매우 흥미롭다. 사실 도자를 매개로 한 교류는 조선 전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임란왜란이라는 엄청난 전쟁을 치르고 다수의 장인들이 납치된 상황이었던 터라 일반적으로는 교류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상황이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도자 교류 양상은 일본 최초의 백토를 발견하였던 이삼평을 비롯한의피랍도공의 활동과 대마도의 요청에 따라 다완을 번조해 주었던 왜관요로 대표된다.260) 淺川伯敎, 『釜山窯と對州窯』, 彩壺會, 1930 ; 泉澄一, 『釜山窯の史的硏究』, 關西大學出版部, 1986. 이 중에서도 왜관에서 벌어진 도자 무역은 당시 양국의 현실적 이해 관계와 일본 내의 조선 다완에 대한 기호의 변화 등이 맞물려 약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임진·정유 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임란 이전 사용하던 왜관을 통해 무역을 재개하였다. 무역의 주체는 부산 첨사와 동래 부사 그리고 일본은 대마도주(對馬島主)였다. 무역품 중에는 자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대마도주가 에도 정부에 선물로 보내기 위해 자기가 필요하였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 이후 일본의 상류 계층에서 조선 다완에 대한 애호가 상당하였기 때문이다.261) 泉澄一, 앞의 책. 반면, 조선은 많은 인력 과 물력이 소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후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의 귀환과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시혜적 차원에서 다완 번조 요청에 응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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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다완을 토산품으로 활용하였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사기번조를 위해 흙과 연료, 장인 등을 왜관 안으로 조달해야 하였으며 이로 따른 민폐를 감수해야 하였다. 이에 따라 거절하는 경우도 빈번하였고, 구청(求請) 과정에서도 숙종 29년의 예처럼 명분과 격식을 중히 여겨 이에 합당치 않으면 단호히 거절하였다.262) 『숙종실록』 권38, 숙종 29년 9월 경술. 이는 일본에 대한 당시 지배층의 생각이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문화적 우위를 바탕으로 비우호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263) 하우봉, 『조선 후기실학자의 일본관연구』, 일지사, 1989, pp.49∼53. 즉, 그들의 요청에 따른 시혜적 차원의 교류였을 뿐 우리가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찾아보기 힘들다.264) 방병선, 「조선 후반기 도자의 대외교섭」, 『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7, pp.253∼284. 그럼에도 좀처럼 보기 힘든 한·일공동 그릇 제작이 왜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후의 역사를 살펴볼 때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교류관련 문헌 기록에서 도자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은 광해군 3년(1611) 왜관의 동관과 서관을 신축하자마자였다.265) 『변례집요』 卷12, 求貿 辛亥. 이때 왜인들이 요청한 것은 다완이었고, 이에 동래부사는 김해의 장인들로 하여금 만들어주도록 하였다. 조선 다완에 대한 일본인들의 선호는 조선 전기부터 있던 것으로 일본의 각종 다회(茶會)에 조선의 다완을 사용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인조 17년(1639)에는 그릇 제작의 우두머리인 두왜(頭倭) 등이 각종 다완의 견본을 가지고 와서 장인과 백토, 나무 등을 왜관 안으로 들여와 다완을 제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은 다 완 제작을 감조하기 위해 왜관 안에서 번조를 원하였지만 조선은 진주와 하동의 장인들을 불러 왜관 밖의 가마에서 제작하도록 하였다.266) 『왜인구청등록』 第1冊, 己卯八月十六日 및 『변례집요』 卷12, 求貿 己卯 八月. 6개월에서 10개월 정도 주문한 다완의 제작이 끝나면, 조선 장인들은 원래의 가마로 돌아갔다.267) 『왜인구청등록』 第1冊, 甲申六月十二日. 인조 22년(1644)에는 보다 구체적인 원료와 장인의 수까지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다완 번조에 사용되는 백토와 황토, 유약 원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약토(藥土)가 등장하였고 장인의 수는 5∼6명으로 증가되었다. 이후 인조 25년(1647)에는 아예 사기번조를 담당한 번조차왜(燔造差倭)가 번조를 청하였다.268) 『변례집요』 卷1, 差倭 丁亥 九月.

효종 1년(1650)에는 다완과 백토, 장인을 요청하였는데,269) 『변례집요』 卷12, 求貿 庚寅 六月. 이전과 달리 왜관 안에서 그릇 번조가 이루어져 명실 공히 왜관요에서 다완 제작이 개시된 것으로 여겨진다. 효종 7년(1656)에는 사기번조차왜(沙器燔造差倭) 외에도 장인왜(匠人倭)가 서계를 가지고 찾아와 번조 요청을 하였다.270) 『변례집요』 卷12, 求貿 丙申 四月. 왜관 안에서 번조가 이루어지면서 아예 번조 과정에 동참하기 위해 장인왜까지 조선에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271) 『왜인구청등록』 第1冊 壬辰九月十五日 ; 第二冊 甲午三月二十日 ; 丙申八月二十六日. 이후 현종 14년(1673)에도 사기번조를 위해 번조두왜와 공장왜 등이 장인과 토목 등을 요청하였다.272) 『변례집요』 卷12, 求貿 癸丑 九月.

숙종 3년(1677)에는 새로이 사기번조 감역왜(監役倭)가 등장하는 등 일본 측이 보다 적극적으로 구청에 임하였으나 가지고 온 서계(書契)에 문제가 있어 이를 되돌리는 일까지 발생하였다.273) 『왜인구청등록』 第5冊, 戌午八月二十二日. 숙종 7년(1681), 대마도주는 에도의 새로운 관백(關白)이 많은 그릇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부응하기 위해 더 많은 각종 사기번조를 요청하였다. 또한, 감역왜뿐 아니라 실제 작업을 하는 공장과 서공(書工), 조각을 맡는 각 2인의 왜인 등을 파견하여 실제 작업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274) 『왜인구청등록』 第5冊, 辛酉三月初二日. 숙종 13년(1687) 역시 경주 백토 45석, 진주 백토 45석, 곤양 백토 45석, 하동 백토 45석을 비롯해서 김해 적감토 90석, 울산 약토 90석 등 총 360석을 요청하였고 사기장 2인은 양산과 기 장에서 각 1명 씩 왜관 안으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275) 『왜인구청등록』 第5冊, 丁卯七月初二日.

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이 요구하는 사기번조의 양이 증가하면서 이에 따른 조선의 민폐도 만만치 않아 구청을 거절하는 경우도 빈번해지게 되었다. 또한, 점차 주문하는 도자기의 양식도 일본식으로 변하여 조선식 다완을 선호하였던 초기와는 양상이 달라져 초기에 내세웠던 번조의 명분도 희미해졌다. 이후 조선의 빈번한 번조 거부와 대마도의 경제 사정 악화, 일본 내 조선 다완을 모방 제작하는 가마들이 생겨나면서 무역 이익이 감소하자, 대마도의 조선에 대한 다완 번조 요청은 숙종 말엽 막을 내리게 되었다.276) 泉澄一, 앞의 책, 1986, pp.767∼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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