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3. 우윳빛 달항아리에 푸른 새가 날고
  • 조선 고유 양식의 개화
방병선

영조 연간은 백자 제작기술과 양식, 생산체제에서 조선의 고유성이 마음껏 발휘되어 꽃을 피운 시기였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하였던 영조는 일찍이 사옹원 도제조를 지냈는데,281) 사옹원의 직제는 도제조 1인, 제조 4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도제조는 대군이나 영의정이, 제조는 문신과 3인의 종친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후대 흥선대원군도 사옹원 제조를 지낸 적이 있다(『증보문헌비고』 권222, 직관고9 사옹원조 ; 『어제집경당편집』 권6, 20장 ; 『어제속집경당편집』 권6, 19장 ; 『흥선헌이대원왕묘지명』). 당시 분원 관리들이 중간에서 그릇을 가로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석간주(石間朱)로 진상다병(進上茶甁)이라 쓰게 하여 진상시키기도 하였다.282) 『승정원일기』 648책, 영조 3년 10월 21일. 또한, 산수와 화훼 등의 도자기의 밑그림을 직접 그려 분원에 가서 구워 오라고 명하기도 하였다.283) 金時敏, 『東圃集』 권7, 잡저 근제 어화첩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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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백자진상다병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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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안정과 청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무역을 하면서 청화백자의 안료인 회회청을 쉽게 살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청화백자의 제작이 활발해졌다. 사대부의 최고 덕목인 청렴결백을 나타내는 절제된 문양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유백(乳白)색의 백자가 금사리 등지에서 제작되었다. 여기에 조선 중화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조선 고유의 기형과 문양이 중국풍의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 시대 양식을 이끌어갔다.

중국에 대한 인식도 변화되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계속된 연행(燕行)을 통해 청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 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여 이들이 선호하던 도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284) 당시 사상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유봉학,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일지사, 1995 참조.

당시 문인 사대부들은 경제적인 여유와 사회 분위기 탓에 점차 주문 기명의 수량과 종류를 확대해 나갔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예술적 취향 이 적극적으로 자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산수문과 사군자가 새롭게 주 문양으로 등장하였고, 달항아리와 떡메병을 비롯해서 양반을 상징하는 연적과 필통 같은 문방기명(文房器皿)의 생산이 확대되었다. 여기에 중국자기의 양식적 특징인 각형 기형이나 여러 가지 장식기법도 유입되었다.

영조 연간 분원의 태토를 캐낼 때는 사옹원에서 낭청이 파견되어 이를 감독하였으나 이들의 폐단이 심하여 낭청 파견을 금지시켰다. 대신 현지 현감을 차사원으로 정하여 굴취를 전담시키고 개굴은 본 현에서 운송은 인근 읍에서 맡도록 하였다.285) 『비변사등록』 137책, 영조 35년 9월 25일. 이런 가운데 광주(廣州)·진주·곤양·양구 등이 태토의 주요 원산지로 법전에 등재되었고 곤양토는 유약의 원료인 물토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86) 『속대전』 권6, 工典 雜令. 물토는 사료에는 水土로 기록되었는데, 도석과 장석이 혼합된 점토로, 재와 규석 등과 섞으면 광택과 점성이 훌륭한 유약이 된다. 이들 원료들은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배편으로 한강 변의 분원까지 운송되었다.

연료는 대개 일 년에 8,000여 거(迲)의 막대한 양의 나무가 소용되는데 분원 부근의 나무를 장인들이 직접 베어 가마 번조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10년이면 거의 소진되어 가마를 옮겨야 하였다.287) 『비변사등록』 79책, 영조 2년 2월 22일. 이동 시에는 장인들이 옮겨갈 장소를 물색하고 건물을 짓고 원료를 운반하는 등 그 노고가 보통이 아니어서 안정적인 생산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연료 문제를 해결해야 하였다. 이에 가마를 옮기지 않고 직접 땔나무를 사기 위해 새로운 세원(稅源)을 찾던 중 광주 시장(柴場) 내의 가호미(家戶米)와 화전세로 우천 강변을 지나는 나무를 땔나무로 사도록 하였다.288) 『비변사등록』 81책, 영조 3년 6월 4일. 그러다 여기에 우천강을 지나는 상인들의 나무에 10%의 세금을 붙여 이를 토대로 분원의 땔나무를 구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우천강 목물수세(木物收稅)로 영조 원년인 1724년부터 시행되었다.289) 『비변사등록』 77책, 영조 원년 4월 8일.

또한, 영조 30년경에는 화원이 내려가지 않아도 청화백자가 분원에서 제작되었다는 기록으로290) 『승정원일기』 1105책, 영조 30년 4월 29일. 보아 이 시기에는 분원 안에도 그 림을 담당하는 화공들이 존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전까지 청화백자의 문양은 조선 최고의 화원들이 담당하였으므로 분원 내에는 화공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번이 허용되고 안료의 가격도 싸지면서 분원 내에도 자연 그림을 담당한 화공이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경종 연간 남종면 금사리로 이전된 분원은, 이후 기록들을 보면 당분간 이설된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291) 『비변사등록』 77책, 영조 원년 정월 7일. 그 후 금사리에서 30여 년을 정착한 분원을 좀 더 수상 운반에 편리한 곳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분원리다. 영조 28년(1752) 봄에 분원리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수운의 편리함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92) 『비변사등록』 120책, 영조 27년 2월 1일 ; 『여지도서』 경기도 양근 물산조, 『여지도서』 상, 국사편찬위원회, 1973,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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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원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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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의 유통을 보면 궁궐 이외 각 관사에서 소용되는 자기들은 공인(貢人)들이 사기전(沙器廛)을 통해 각사에 납품하였다. 오늘날 정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청에서 구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관리들의 지나친 간섭과 부정으로 효종 8년(1657) 해체되었다.293) 『승정원일기』 144책, 효종 8년 1월 9일. 이후 다시 복구되었지만 폐단이 심해져서294) 『승정원일기』 1105책, 영조 30년 4월 23일. 공조에서 별도로 사기를 무역하거나 사기점인(沙器店人)에게 수세하기도 하였다. 또한, 진상자기 중 수납이 거부된 수량의 반을 공조에서 받아 충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장인들이 사기전을 열거나 매매행위에 직접적으로 나서는 것은 여러 견제를 받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295) 『승정원일기』 1102책, 영조 30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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