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3. 우윳빛 달항아리에 푸른 새가 날고
  • 백자에 재현된 조선 진경
방병선

영조 전반 분원이 위치하였던 금사리의 가마(1720∼1752) 도편에서 많이 발견되는 청화백자 문양으로는 패랭이꽃, 붓꽃, 국화, 난초, 선인초 등의 초화문을 들 수 있다. 이들 초화문은 간략한 선묘로 처리되었는데 그 모양은 조선의 들녘 어디에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화백자초화문팔각항아>리는 능화형을 사면에 배치하고 능화형 안에는 난초와 석죽(石竹), 선인초, 국화를 시문하였다. 이들 문양들은 아래에는 지면을 연상시키는 태점(苔點)을 서너 개 찍어서 야생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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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초화문팔각항아리
청화백자초화문팔각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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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난초는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18세기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들 문양들은 완연한 사군자의 모습은 아니나 석죽을 대나무로, 선인초를 매화로 본다면 국화와 함께 사군자의 형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두 면에 걸쳐 능화형을 배치하고 모 서리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초화문을 묘사하였는데 사군자에 능숙하지 않은 화원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산뜻한 초화문은 항아리 이외에도 병, 연적, 필통 등에 주제 문양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초화문에 보이는 여백을 중시한 공간 운영은 조선백자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초화문은 점차 화분에 분재된 형태로 등장하거나 수석과 어우러져 시문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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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철채동채난국초충문병
청화백자철채동채난국초충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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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충문(草蟲纹) 역시 이 시기 백자에 자주 등장하는 화제다. 회화에서는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초충도(草蟲圖)가 있지만 조선 전기 청화백자에는 많이 그려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들어 다양한 소재와 구성으로 초충도가 그려졌는데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청화백자철채동채국란초충문병>이 좋은 예이다. 기다란 목의 둥그런 몸통에 국화와 난초가 청초하게 표현되었고 여기에 한 두 마리 작은 곤충이 덧붙여져 한 폭의 초충도가 완성되었다. 전체 구도는 우측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산화동과 산화철로 채색된 국화와 좌측으로 가느다랗게 뻗은 세 줄기 난초가 청화로 채색되어 화사함을 자아내고 있다. 국화의 좌측 상단에 그려진 곤충은 공간을 메워 잘 짜여진 구도를 보여주 고 있다. 기법이나 장식을 보면 난초는 솜씨 좋게 양각한 후 코발트를 원료로 하는 푸른 청화안료로 양각된 부위를 채색하였다. 국화 가지는 양각한 후 철화안료로 진하게 채색하였고, 잎은 하나하나 별도로 만들어 부착한 첩화기법을 사용하였다. 국화잎은 아래 한 송이, 위 세 송이를 배치하였는데 산화철을 사용하는 철화와 산화동 안료로 백국(白菊)과 홍국(紅菊), 흑국(黑菊)으로 소담스럽게 재현되었다. 두 마리 나비는 정교하게 양각된 후 날개 끝만 연하게 철화나 청화로 채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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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조어문떡메병
청화백자조어문떡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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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서정성과 사실성을 갖춘 국화와 난초 문양은 당대 화풍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병에는 당시 조선의 도자 기술로는 좀처럼 동시에 얻기 힘든 청화, 철화, 동화의 세 가지 색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달항아리를 연상케 하는 하반부와 정선의 초충도나 심사정의 국화도, 석죽도와 유사한 구도, 여백을 중시한 공간운영 등 조선 후기 백자의 대표적 작품으로 추정된다.

초화문 이외에도 낚시 장면을 그린 어부도(漁夫圖) 역시 이 시기 청화백자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원래 낚시하는 장면은 그 의미상 은둔이나 탈속(脫俗)을 상징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나이가 지긋이 든 어부가 홀로 조대(釣臺)나 낚싯배에 앉아 여유롭게 낚시를 하는 조어도(釣魚圖)와 낚시를 마치고 귀가하는 귀어도(歸漁圖), 그 와중에 나무 꾼을 만나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등의 세 종류가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들어 산수 배경 등을 생략하거나 간략화하면서 실제 어민의 풍속 장면이나 낚시 장면에 담긴 시정(詩情)까지 표현하는 것으로 방식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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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화백자산수문병
중국 청화백자산수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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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회화의 경향이 백자에 그대로 재현된 것이 간송미술관 소장 청화백자떡메병에 그려진 동자조어도(童子釣魚圖)다. 문양은 깎아 지른 절벽 아래 홀로 낚시하는 동자를 사실적으로 그려 넣었다. 우측에 그려진 바위는 부벽준을, 나머지는 간결한 세필로 윤곽선을 표시하여 조선 사대부의 미적 취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회화에 주로 등장하는 어옹(漁翁) 대신 순진무구해 보이는 떠꺼머리총각이 의자에 앉아 두 발을 물에 담근 채 대나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강물은 짧은 선으로 능숙하게 묘사되었고 뒤편에는 두 마리 오리가 총각 쪽으로 헤엄치며 다가오고 있다. 배경 문양은 전부 생략되었고 오직 총각 뒤의 커다란 바위와 풀만이 남아 있다. 부벽준의 바위는 굵게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묽게 이리저리 칠한 붓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농담을 잘 구사하였다. 그려진 문양을 파노라마처럼 죽 늘여서 펼쳐 놓으면 이 시대 청화백자에서만 볼 수 있는 서정성과 회화적 완성도가 그대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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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산수운룡문연적
청화백자산수운룡문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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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1676∼1759)의 동정도
정선(1676∼1759)의 동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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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조 연간 들어 주목할 것은 여러 문양 중에서도 산수문이 백자에 등장한 사실이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 문양은 왕실을 상징하는 용봉문을 비롯해서 청렴결백과 기개, 문인의 품격을 상징하는 송죽매(松竹梅)와 약간의 길상문, 화조문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당대 회화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던 산수문은 백자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청화백자산수문은 14세기 원대(元代)부터 배경 문양으로 등장하다가 17세기 명말청초기(明末淸初期) 청화백자에 본격적으로 주제문으로 사용되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296) 방병선, 「명말청초 중국 청화백자 연구」, 『강좌 미술사』,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8, pp.321∼351. 중국 청화백자에 산수문이 등장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은 문인 수요층의 확대와 당대 회화에서 판화나 화보집 간행의 유행 등 도자에 산수문을 옮기는 데 용이한 상황이 전개된 것을 들 수 있다.

조선백자의 경우도 아마 사번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사대부계층이 주 수요층으로 부상하면서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 이외에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중국에서 『개자원화전(芥子園畫典)』과 같은 화보의 전래와 진경산수화와 남종문인화의 유행 등 회화에서의 괄목할 만한 변화와 함께, 계속된 연행(燕行)에 따른 중국 자기의 유입이 한몫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야흐로 회화와 도자의 본격적인 만남이 백자에 산수문이 시문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조선과 중국의 청화백자 산수문을 비교할 때 가장 주목되는 것은 조선 청화백자에는 주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많이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소상팔경은 소강과 상강이 만나는 중국 동정호(洞庭湖) 중에서 8가지 경치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전기 이후 그림과 시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직업화가뿐 아니라 문인화가들 사이에서도 그려졌다. 18세기 들어서도 정선은 물론 그 다음 세대인 김득신, 심사정, 최북 등도 소상팔경도를 남긴 것을 보면 여전히 인기 있는 화제(畫題)였다.297) 안휘준, 「한국의 소상팔경도」, 『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88, pp.162∼249. 청화백자에 소상팔경이 가장 많이 소재로 등장한 것은 아마도 일반 사대부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고 구도와 필 치, 농담 등이 백자에 그리기 용이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조선 청화백자에 나타난 소상팔경문은 그림과 달리 백자의 기형에 맞게 강조할 곳은 강조하고 생략할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면서 입체 기형에 맞는 새로운 소상팔경문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당시 수요층이 그릇과 그림의 조화를 통해 장식성과 회화성을 동시에 만족하고픈 욕구에 부응한 결과로 생각된다.298)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 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pp.163∼166.

소상팔경의 8가지 주제 중에서 조선백자에 가장 시문 빈도가 높았던 것이 산시청람도(山市晴嵐圖)와 동정추월도(洞庭秋月圖)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화백자산수매죽문호>는 여의두문과 연판문이 상하 종속문으로 사용되었고 그 사이 능화형 테두리 안에 각기 동정추월과 산시청람을 묘사해 놓았다.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의례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잘 생긴 항아리로, 먼저 동정추월도의 경우 악양루로 보이는 누각을 화면 오른쪽 하단에 배치하였고, 원경에는 물결에 휩싸인 봉우리와 달의 표현이 뚜렷해서 동정추월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경은 거의 비워놓아 볼록한 항아리의 기형과 어울려 공간감을 더욱 느끼게 한다. 물결을 나타내는 단선은 달빛이 고요한 강 풍경에 운치를 더해준다. 근경과 원경을 이어주는 왼쪽의 배와 우측 사선 구도로 공간 활용의 폭을 넓힌 악양루의 부각은 정선의 <동정도>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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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산수매죽문호
청화백자산수매죽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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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된 소상팔경과 반대로 중국식 도상을 충실히 옮겨놓은 것들도 있다. 일본에 소장된 청화백자사각병의 동리채국(東籬採菊) 장면은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그대로 실려 있어서 중국 화첩을 모본으로 한 그림들도 청화백자의 화제(畵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각병의 반대 면에는 섬세한 필치의 하정납량도(荷亭納凉圖)를 그려 넣었는데 이 역시 『만고기관첩』에 실려 있는 한후량(韓後良)의 황혼침량(黃昏沈凉)과 구도와 포치에서 유사성을 보인다.299) 유미나, 『중국 시문을 주제로 한 조선 후기 서화합벽첩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pp.15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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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산수문사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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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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