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2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 04. 청화 반상기를 수놓은 길상문
  • 사기전과 분원공소
방병선

17세기 이후 서울에는 곳곳에 사기전이 설립되어 각 관공서에 그릇을 공납하거나 일반인에게 백자를 판매하고 있었다.332) 『승정원일기』 1228책, 영조 40년 3월 28일 기묘. 이러한 사기전을 운영하는 자는 중인이나 다른 신분의 사람들로 분원 장인 들의 설전(設廛)을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숙종 연간 분원 장인들에게 사번이 허용된 후, 진상하고 남은 그릇의 판매를 위해 분원 장인들이 서울의 사기전 부근에서 설전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기존의 사기전인들이 침징(侵徵)이라 반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333) 『승정원일기』 1102책, 영조 30년 1월 10일 경신 ; 영조 30년 1월 16일 병인.

이 시기 서울에서 사기전이 열린 곳은 종로, 이현, 칠패 등의 난전이 열렸던 곳으로 현재의 종각 부근과 동대문 근처, 서소문 일대다. 사기전은 그릇을 일반에게 판매하는 것 이외에 분원 진상기명이 부족할 때는 대전(大殿)에 그릇을 대여하였다. 또한, 당시는 중간 도매상이 있어서 사기전과 분원이나 지방 가마와 같은 생산지를 연계시켜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이후 공인(貢人)이 되거나 전문 판매업자로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분원자기뿐 아니라 중국 그릇도 판매하여 당기중도아(唐器中都兒)라고 불렸다.334) 『승정원일기』 1099책, 영조 29년 10월 9일 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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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사기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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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분원백자의 원료는 고종 연간 완성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나타난 것처럼 진주와 곤양, 양구, 광주 등의 백토와 물토 등이었다.335) 『육전조례』 권2, 이전 사옹원조. 일부 사용하는 백토의 양이나 기타 원료의 양과 가격은 18세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 19세기 분원백자들은 대부분 청백색을 띠고 있어서 산지는 같으나 원료의 성분이 다르거나 철분 제거 등의 원료 정제가 충분치 못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분원의 운영체제와 원료 채굴방법, 분원강 목물수세, 광주와 양근 시장(柴場)에서 거둬들이는 시곡(柴穀) 수세 등은 이전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19세기 후반 들어 왕실 재정의 악화로 분원 경영은 점차 어려워졌다. 장인들에 대한 대우는 열악하고 원료와 연료 수급도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진상한 그릇 값을 제때 받지 못하여 생산 책임을 담당한 분원 변수(邊首)들이 도산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여기에 솜씨 좋은 장인들을 꾀어 다른 민요로 데려가거나, 진상할 물건들을 사번으로 빼돌리기도 하여 이미 왕실용 자기 공장으로서의 충실한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1874년 공포된 『분원변수복설절목』은 진상한 그릇의 값을 조정에서 제때 받지 못한 변수들이 도산하거나 오로지 분원자기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려 하였던 일부 변수들의 문제점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336) 「分院邊首復設節目」, 1874, 규장각 古大 4256-10. 이를 보면 1870년대 분원이 원래의 설치 목적과 달리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고종 후반 들어 재정 지출이 더욱 증가하자 조정은 국가 재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감생청(減省廳)을 구성하고 조직과 인원을 감축하는 구조 조정을 단행하였다.337) 방병선, 『조선 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pp.142∼144. 이 과정에서 사옹원 분원은 아예 민간 번조를 허용하고, 그 운영을 공인들에게 이양함으로써 공인들로 하여금 왕실용 그릇을 바치도록 하였다.338) 방병선, 「고종 연간의 분원 민영화 과정」, 『역사와 현실』 33, 1999, pp.183∼216. 세조 연간부터 운영되어 온 국영도자기 공장인 분원이 거듭되는 재정 악화로 1884년 분원공소로 바뀌는 경영 형태의 일대 전환을 맞이한 것이다.

분원 민영을 공포한 『분원자기공소절목(分院磁器貢所節目)』을 보면, 분원은 관의 관여를 받는 공소(貢所)로 조선 정부는 공인들에게 여전히 백자의 원료와 장인들의 급료를 지급하였고, 우천강수세(牛川江收稅)와 시장세(柴場稅)와 같은 지원을 하고 있었다.339) 『分院磁器貢所節目』, 규장각 古4256-11. 이런 점에서 당시 분원은 완전한 민영화가 되었다기보다는 공인들에게 진상을 책임지게 한 반관반민의 경영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상을 책임지게 된 분원공소는 대신 서울의 주요 그릇 시장에 진출하여 그릇 거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서울과 경기 지역에 대한 그릇 판매 독점권을 얻어내어 판매 특권과 이익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분원공소는 진상 그릇을 납품하고도 이전처럼 수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경영은 악화되어 갔다. 분원공소의 공인이었던 지씨가 기록한 『하재일기(荷齋日記)』에 의하면,340) 박은숙, 「개항 후 분원 운영권의 민간 이양과 운영실태-하재일기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2, pp.251∼295. 당시 정부로부터 미수금의 규모가 너무 커서 1894년에 이르러서는 채산성 악화로 아예 공소를 파하자는 의견이 대두될 정도였다.341) 공인 지씨, 『하재일기』 1894년 9월 22일, 이후 분원공소는 경영 악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대신 1897년경에는 분원공소의 생산력을 부활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자본과 손을 잡은 번자회사(燔磁會社)가 설립되었다.342) 앞의 책, 1897년 1월 14일 ; 1월 16일 ; 1월 21일 ; 2월 3일 ; 2월 17일 ; 2월 21일. 이 회사의 본사는 서울 광교에 있었고 광주의 분원은 제조장 역할을 하였다.

당시 조정에 진상된 그릇의 가격은 품질에 따라 원진상가(元進上價)와 별번(別燔)과 예번(例燔)으로 나뉘어 가격의 차별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예번은 연례적인 진상그릇을 지칭한 것이고, 별번은 원래 진상하던 것 이외에 왕실 혼례 등으로 별도 주문을 한 그릇으로 대게 청화백자나 갑발에 넣어 구운 고급 그릇들이었다.

『분원자기공소절목』에는 그릇의 명칭과 가격이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가격이 비싼 것은 13량의 양각칠첩반상기로 3칸 집 한 채 값과 같을 정도였다. 그릇의 단위는 종류에 따라 각각이다. 사발, 탕기, 접시, 보아·종지·등잔·연적 등은 개(個)·항아리·합·향로 등은 부(部)·용준과 대병(大甁)은 좌(坐)·잔과 잔대(盞臺)·다종(茶鐘)·반상기는 건(件)·채연(彩硯)은 면(面)·합과 찬합·대야·식소라는 좌(座) 등이 사용되었다.

한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분원 이외에 전국에 걸친 자기와 도기, 백점토의 산지와 시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343) 서유구, 『임원경제지』, 「예규지」권3-4, 화식. 자기의 경우 총 37곳에서 산출이 될 정도로 관요 이외에도 지방 가마의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는 당시 지방 가마의 그릇들은 분 원자기와 비교할 때 색상이 지저분하고 질이 좋지 못하여 농민들의 새참용 밥그릇으로 사용할 정도의 하품이라 지적하였다.344) 앞의 책. 그러나 이러한 지방 가마 그릇들은 가격의 저렴함을 무기로 서울에서 암암리에 판매가 되어 분원 그릇 상인들과 빈번히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황해도 해주의 석간주나 백자들은 서울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던지, 해주 항아리의 유통과 판매를 저지하고 심지어 제작한 장인들까지 잡아들이는 일도 있었다.345) 공인 지씨, 『夏齋日記』 1891년 7월 21일 ; 8월 25일,

분원자기나 지방 자기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수입 자기도 유통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같은 중국 자기라 하더라도 책문(柵門)보다는 연경(燕京)의 것이 우수하고 순백자가 부호들에게는 더욱 비싼 값으로 인기가 있었다.346) 서유구, 앞의 책. 일본 자기의 경우 화려하고 정미하며 금채로 수복(壽福) 문자를 가운데 써넣어 장식한 것 등이 유통되었다.347) 앞의 책. 이러한 수입 자기는 조선백자보다 질이 높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이규경 같은 학자는 일본자기가 백색도(白色度)가 좋고 얇게 성형이 가능한 것은 심지어 중국보다도 우수하다고 생각하였다.348) 이규경, 앞의 책, 「古今瓷窯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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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로 갈수록 일본과 중국의 수입 자기는 더욱 광범위하게 조선에서 유통되었다. 1895년에는 아예 일본인이 조선에 가마를 차리고 국장(國葬)에 소용되는 그릇을 진상하기도 하였다.349) 공인 지씨, 『하재일기』 1895년 7월11일 ; 12월 15일. 당시 일본의 그릇 제작기술 수준은 상당하였고 조선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기술을 도입하려고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유 럽에서 자기 제작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대량 생산의 기틀을 갖추었다. 또한, 아리타[有田]를 중심으로 조선에 수출용 그릇 생산을 위한 가마를 설치하는 등 조선 그릇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기술적으로도 실제 일본의 자기는 상회백자를 포함해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고 유럽 수출에 이어 파리박람회 등의 출품으로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조선 대신 어윤중이 분원에서 연소자 10여 명을 선발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추진하려고까지 한 것은 이를 대변한다.350) 공인 지씨, 『하재일기』 1895년 3월 20일(방병선, 「『하재일기』 를 통해 본 조선말기 분원」, 『강좌미술사』 34, 2010, pp.271∼297).

중국도 경덕진의 어기창(御器廠)이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데다 대내외 적으로 어려움에 싸여 있어 이전만큼의 질 좋은 그릇을 생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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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 한일통상기념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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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선 말기 청일 양국 자기의 조선 내 유입과 유통 장악은 조선의 상권이 양국 상인들에게 장악되어 가던 조선의 경제 실정과 다를 게 없었다. 이에 조선 도자 생산은 큰 타격을 받아 점차 쇠퇴 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이외에도 조선의 실정을 반영하듯 서양의 그릇들도 점차 왕실 사용이 증가하였다. 궁 내부에서 연회 시 사용할 그릇의 차용을 위해 건양(建陽) 2년(1897)에 낸 공문을 보면 양(洋)우유기, 포도주잔, 양대접시, 양소접시 등의 서양 그릇들이 등장한다.351) 「宮內府案」,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2. 이처럼 왕실에서 청과 일본뿐 아니라 유럽의 자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조선의 자의적인 선택도 있겠지만, 외국 자기를 쓸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처지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352) 최건, 「대한제국시대의 도자기」, 『오얏꽃 황실생활유물』, 궁중유물전시관, 1997, pp.57∼59.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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