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1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
  • 03. 전통적인 입지 원리로서의 풍수와 취락
  • 도읍과 풍수
이용석

풍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역사에서 도읍과 취락, 묘역 등의 입지 선정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자연관과 공간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풍수적 자연관과 공간관은 최근 지리학·건축학·조경학·역사학 등에서 재해석되고 있으며, ‘자연과 인간’·‘전통과 현대’의 상생과 조화라는 가치 속에서 우리의 실생활에 한층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는 한국의 전통적인 자연관이자 공간관인 풍수사상과 그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최근 지리학, 건축학, 조경학, 도시계획 등 환경생태 관련 학문 분야에서 풍수에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재조명하며 현대 사회에 적용과 접목을 시도하는 것도 그러한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현대 사회에서 풍수의 현재적 의미는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데에 있다는 주장은 큰 의미와 많은 시사점이 있다.

과거 우리 역사에서 정치적 혼란기나 왕조 교체기에는 어김없이 수도의 이전을 두고 풍수 논쟁이 일어났던 것처럼, 명당의 여부를 두고 다양한 풍수적 논리와 해석이 동원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최근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사업과 관련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도보시대의 네트워크와는 크게 달라진 현대 사회에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교통·정보·통신 체계 속에서는 도시 입지 선정 시 풍수적 요건 외에도 다방면에 걸친 입지 요건들이 반영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600년이 넘는 동안 수도로서 기능과 상징을 이어가고 있는 서울을 중심으로 풍수적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서울이 풍수적으로 명당인가에 대한 평 가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체로 많은 풍수가들은 서울이 명당이라는 사실에 크게 이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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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내사산과 외사산
서울의 내사산과 외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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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풍수에서 모식화하는 전형적인 명당의 유형에 대체로 부합하는 것으로 본다. 풍수에서는 명당을 둘러싼 네 방향의 산줄기를 ‘사신사(四神砂)’라 하여, 힘있는 사신사가 명당을 잘 감싸고 있는 곳을 좋은 땅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보면, 서울 그 중에서도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북쪽으로 북악산(또는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으로는 좌청룡 격인 낙산과 서쪽으로는 우백호 격인 인왕산이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을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 밖으로 한 겹의 사신사가 더 두르고 있는데, 북쪽으로는 북한산, 동쪽으로는 아차산, 서쪽으로는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남쪽으로는 관악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안쪽에서 명당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 하고, 밖에서 명당을 둘러싸는 네 개의 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물의 조건으로도 명당을 관류하는 내명당수인 청계천이 흐르고, 외명당수인 한강이 밖을 두르고 흐르는 전형적인 명당의 모습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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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나루터
마포 나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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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는 음양오행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오행인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는 각기 고유한 색깔, 방향, 맛, 음, 계절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오방색’은 바로 오행이 가진 방향에 따른 고유의 색이며,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오행과 관련이 있다. 오행 중 목(木)은 동쪽과 청색 그리고 인(仁)과 관련이 있으며, 화(火)는 남쪽과 붉은색 그리고 예(禮), 토(土)는 중앙과 황색 그리고 신(信), 금(金)은 서쪽과 흰색 그리고 의(義)와 관련이 있으며, 수(水)는 북쪽과 검은색 그리고 지(智)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오행의 방향과 상징은 각각 서울의 도성 내 4대문 이름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도성의 동쪽 문에는 인(仁)을 넣어 동대문을 ‘흥인지문’이라 하였고, 서쪽 문에는 의(義)를 넣어 서대문을 ‘돈의문’이라 불렀으며, 남쪽 문에는 예(禮)를 넣어 ‘숭례문’이라 이름하였다.

사신사와 음양오행의 원리 등을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풍수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도성이 들어설 자리를 정하고 북악산(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세우려 하였 다. 그러나 남쪽으로 마주한 조산(朝山) 관악산이 마치 톱날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보였다. 관악산은 모양새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부터 이 산을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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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4대문
서울의 4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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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가들은 관악산에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도성 안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이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비보책(裨補策)이 필요했다. 그 첫 번째 방책은 관악산의 화기를 피하기 위하여 경복궁과 관악산이 정면으로 마주보지 않도록 방향을 트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복궁은 정남방에서 동으로 약 3도가량 비켜 세워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는 데 부족하다고 보았다. 때문에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맞서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문의 현판을 종서(縱書, 내려쓰기)에 종액(縱額, 세로쓰기)으로 달도록 하였다. 대체로 누각이나 성문의 현판은 가로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유독 숭례문의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를 맞받아칠 수 있도록 세로로 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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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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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숭례문(崇禮門)’이라는 남대문의 이름도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숭례문의 ‘예(禮)’자는 오행으로 볼 때 화(火)에 해당된다. 또한, ‘높인다.’·‘가득 차다.’라는 뜻을 가지 ‘숭(崇)’자와 함께 써서 수직으로 달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만들어,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는 오행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이는 불을 상징하는 글자에 세로쓰기한 현판을 세로로 세워 관악산의 화기에 맞대응하게 한 풍수적 방책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서울의 풍수적 약점을 보완하는 한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을 열어두면 음기, 즉 음풍이 강하여 풍기문란이 조장된다고 믿어 숙정문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의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성 안의 지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관악산으로부터 들어오는 화기를 막고자 함이었다.

관악산의 화기와 관련하여 광화문 앞의 해태상도 빼놓을 수 없다. 광화문 앞 양쪽의 해태 두 마리는 모두 남쪽의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역시 화기를 막기 위한 풍수적 방책 중의 하나였다. 경복궁에 화재가 빈번하자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대원군은 이 역시 관악산의 화기를 원인으로 보아 도성 내 뛰어난 석공에게 해태상을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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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해태상
광화문과 해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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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해태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하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해치라고도 한다. 해태는 뿔이 하나인 상상의 동물로서, 양과 호랑이를 섞어놓은 형상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사헌의 흉배에 해태를 새기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령스러운 동물[神獸]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하기도 하였다.15)정종수, 「남대문 현판 왜 세로로 달았나」, 『민속소식』 106, 국립민속박물관, 2004, pp.6∼7.

그러나 경복궁의 남문을 지키던 해태상은 불행히도 일제강점기 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원래 자리를 떠나게 된다. 총독부 건물이 완성된 후에는 청사 앞에 다시 옮겨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해방 후 제3공화국에 이르러 지금의 광화문이 다시 복원되면서 해태상도 함께 옮겨졌다. 원래의 해태상 위치는 1927년에 일제에 의해 헐린 광화문 금천교 앞으로 지금의 정부 종합청사와 광화문 시민 열린마당 앞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1968년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해태상은 광화문 앞에 돌아왔지만, 최근 광화문 복원 공사를 위해 다시 옮겨졌다가, 2010년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았다. 다만, 원래 위치였던 곳이 현재는 도로라서 광화문 앞에 앉혀지게 되었다.

최근에는 광화문의 해태상을 두고, 풍수괴담이 떠돌기도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공공연히 일간신문에 실리기도 했는데, 2008년 숭례문 화재, 정부종합청사 화재, 잇따르는 촛불시위 등 서울 도성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불과 관련된 징후들이 광화문의 해태상 때문이라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관악산의 화기를 누를 수 있는 세 가지 방책 중 두 가지 이상이 결여되면 더 이상 화기를 막기 어려우며, 그러한 탓으로 서울 시내에 불과 관련된 사건이 잇따른다는 것이다.

세 가지 방책은 숭례문의 세로 현판과 숭례문 앞의 남지(南池), 그리고 광화문 앞의 해태상인데, 남지는 서울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일찌감치 없어졌으며, 광화문 앞의 해태상은 2006년 12월 무렵, 광화문 원형복원을 위해 임시 철거되어 따로 보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세 가지의 방책에서 두 가지가 결여되면서 화기를 누르지 못하여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이어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화재사고가 있었고, 곧이어 정부의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과 관련한 촛불집회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과 관련된 일들이 서울 시내에서 계속 발생하는 것도 바로 화기를 제대로 다스리 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 쓰였던 것과는 반대로, 부족하고 모자라는 땅의 기운을 보충하기 위한 풍수적 비보(裨補)가 적용된 사례도 있다. 앞서 도성의 4대문의 이름을 살펴보았는데, 다른 현판은 모두 세 글자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유독 도성의 동문인 ‘동대문’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네 글자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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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
흥인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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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닭은 흥인지문 일대의 땅 모양새에 있다. 혜화동의 뒷산인 낙산에서 이화여대 부속병원, 동대문, 그리고 장충동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울의 성곽이었는데, 특히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전 동대문운동장에 이르는 구간의 산줄기가 약해 그 기운을 보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부족한 땅의 기운을 보태기 위한 방책의 하나가 문 이름에 글자를 더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한 글자가 ‘갈 지(之)’였다. 곧, ‘가다’는 뜻으로 산줄기의 흐름을 길게 이어준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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