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1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
  • 03. 전통적인 입지 원리로서의 풍수와 취락
  • 고을과 풍수
이용석

우리나라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에 사는 인구 비율을 의미하는 ‘도시화율’이 50%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5년에는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이 약 90%를 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10명 중 9명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고, 도시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라는 용어가 그만큼 우리의 입과 귀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라는 현대적 개념의 용어가 등장한 것은 불과 100년이 채 안 된다. ‘도시’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인 ‘도시계획’이란 개념이 들어오면서 정립된 용어로 보인다. ‘도시(都市)’라는 글자가 오래된 문헌 속에 나타나는 예는 중국의 『한서(漢書)』이다. 여기에 기록된 도시는 도(都)와 시(市)의 합성어로, ‘도’는 왕이나 군주가 거쳐하는 곳을 의미하며, ‘시(市)’는 상업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시(場市)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왕이 거처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상업이 번성한 곳을 이르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도시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시라는 용어가 그 이후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사용되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의 부산, 대구, 대전, 광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상업이 번성한 곳을 일러 무엇이라고 불렀으며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였을까?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당시에 평양·대구·상주·나주 등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있으며,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을 ‘대읍(大邑)’이라 표현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불린 ‘강경’을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쪽 가운데에 하나의 큰 도회(都會)로 되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지금의 도시 형태와 개념을 가진 뜻으로 도회(都會), 도회지(都會地), 도회처(都會處), 대처(大處) 등으로 이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현은 나이 지긋한 시골 어르신들에게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도회지에서 오신 양반……”이나 “대처에 나갈 일이 있다.” 등의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회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우리나라 지방의 도회들은 대체로 교통 요지에 위치해 지방의 행정·군사·경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 방어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가지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왕권을 대신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던 만큼, 수령이 파견된 고을은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지방 권력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왕이 거처하는 도읍인 한양에서도 풍수적으로 가장 좋은 곳, 즉 주산 기슭의 가장 밝고 생기가 넘치는 명당에 궁궐을 건축했듯이 고을에서도 최고 명당에 해당되는 곳에 관아를 배치하였다. 또한, 『주례』 「동관고공기」에 나타난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祠)의 원칙, 곧 한양에서 궁궐 앞에 육조(六曹)를 배치하고 그 뒤로 시전(市廛)을 두었으며,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종묘(宗廟), 오른쪽으로 사직단(社稷壇)을 둔 것처럼 지방의 고을에서도 자연조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러한 원칙을 따랐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도회의 입지와 공간 배치는 자연 지세와 국면의 규모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유사한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도회의 풍수적 입지와 공간 배치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군현지도이다. 당시의 군현지도는 전통적인 산수화의 원근기법이나 조감도의 형식으로 그려진 회화식 지도인 경우가 많은데, 군현 내부를 동일한 축척으로 그리지 않고 행 정 단위의 중심지인 고을을 확대해서 그리고 나머지 주변 지역은 상대적으로 소략하여 그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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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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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를 비롯한 각종 시설물의 배치를 상세히 그렸으며, 산과 하천을 표현하는 데는 풍수적인 사고가 반영되었는데, 산줄기는 연맥의 형상을 나타내고 하천은 유로의 크고 작음과 중요도에 따라 고을을 중심으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 군현지도 중 경상도의 <선산부 지도(善山府地圖)>를 살펴보면 고을의 주산인 비봉산(飛鳳山)의 맥세를 가장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좌청룡·우백호의 산줄기가 고을을 감싸고 있다. 하천은 읍성 밖을 휘감아 흘러가는 것으로 표현하였고, 고을의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잘 조화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고을 주변의 산세와 하천의 표현방법과 내용은 풍수적 사고와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림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풍수적인 지명과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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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부 지도
선산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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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의 주산인 비봉산에 대응하여 고을 읍성 밖 동남쪽에는 오란산(五卵山)의 지명이 둔덕 그림과 함께 있다. 이것은 고을의 주산인 비봉산의 날아가려는 봉황을 머무르게 하기 위해 다섯 개의 동산을 알 모양으로 만들어 봉황알로 삼은 것으로, 이러한 사례는 다음의 경상도 순흥부(順興府)에도 나타나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일대는 조선시대 순흥부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순흥 고을은 소백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닿는 비봉산을 주산으로 삼는다. 비봉산은 마치 봉황이 날기 위해 날개를 펴는 듯한 형상을 띠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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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의 비봉산과 봉란
순흥의 비봉산과 봉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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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고귀함과 평화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순흥의 흥망성쇠는 바로 주산의 봉황이 날아가느냐 아니면 이곳에 머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봉황을 머물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을의 남쪽 수구에 해당하는 곳에 누각을 세워 영봉루(迎鳳樓)와 봉서루(鳳棲樓)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봉황을 맞이하여 머물도록 하겠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또한, 누각 옆에 작은 둔덕 3개를 만들어[造山] 봉황알[鳳卵]로 삼았는데, 이는 봉황에게 알을 품게 해서 고을에 머물게 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경상남도 창녕의 영산(靈山)에서는 ‘영산 쇠머리대기(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라는 민속놀이가 전해지고 있다. 나무쇠싸움이라고도 하는 쇠머리대기는 줄다리기와 함께 정월 대보름날에 행해졌으나, 영산의 민속축제인 ‘3·1문화제’가 열리는 양력 3월로 날짜가 옮겨져 시연 되고 있다. 쇠머리대기 놀이는 나무로 엮어 만든 소 모양의 동채 둘을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동서로 나누어 서로 겨루는 것이다. 이는 두 마리 황소의 대결을 형상화한 것으로 그 기원은 영산 고을의 풍수적 지세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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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루
봉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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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영산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는 영취산과 함박산의 모양이 흡사 두 마리 소가 마주 겨누고 있는 형상으로 둘 사이에 산살(山煞)이 끼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살을 풀어야만 두 산 사이에 있는 영산 고을이 평안할 수 있다고 믿는 살풀이 민속의 하나로서 이 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인 고을의 입지와 공간 배치에는 풍수적인 사고와 원리가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고을의 입지는 오늘날까지 행정 중심지의 기능을 유지하며 그 위치적 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근대적 교통수단과 간선 교통로에서 비껴 있거나 일제 강점기에 단행된 군면 통폐합에 따라 쇠퇴의 길로 접어든 곳도 적지 않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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