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1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
  • 03. 전통적인 입지 원리로서의 풍수와 취락
  • 마을과 풍수
  • 1.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이용석

‘닭실마을’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1리에 속하며, 유곡1리는 닭실·중마·구현 등 3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유곡리는 풍수상 땅의 모양새가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인 ‘금계 포란형(金鷄抱卵形)’이고, 또한 간지(干支)에 의한 방위가 유향(酉向)을 취하였기 때문에 ‘유곡(酉谷)’ 혹은 ‘닭실’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대체로 한자 지명보다는 한글 지명인 ‘닭실’을 선호하며, 이곳 권씨들을 ‘닭실 권씨’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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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내성 유곡(닭실마을)
봉화 내성 유곡(닭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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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내려 마치 암탉이 알을 품은 듯 자리 잡은 백설령과 둥우리인양 마을을 감싸 안은 옥적봉과 남산, 그리고 마을 앞을 유유히 지나는 내성천은 마을 앞을 유유히 흘러나간다. 이러한 닭실마을의 땅 모양새를 ‘금계포란형’이라 부른다. 그 모양새를 ‘금닭’이라는 형상에 상응시켜 그 땅의 성질과 기운을 읽어내고자 함인데, 이것은 ‘금닭’이라는 상서로운 동물이 상징하는 의미를 통해 마을의 평안과 자손의 복됨을 기원하는 자연 인식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마을에는 풍수적 금기가 있는데, 풍수상 땅의 모양새가 금닭 이 알을 품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품고 있는 알이 깨지면 마을의 안녕과 좋은 기운이 손상을 입게 되고 상징적 의미가 훼손된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마을 사람들은 알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마을 내에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고 샘에서 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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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의 지형과 주요 경관 구성 요소의 입지
닭실마을의 지형과 주요 경관 구성 요소의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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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이상적 거주지로서 ‘계거(溪居)’의 요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곳으로, 경주의 양동마을[良洞], 안동의 하회마을[河回], 내앞마을[川前]과 함께 ‘닭실마을[西谷]’을 삼남의 4대 길지로 꼽았다.

닭실은 지연(地緣)이라는 장소 공유를 통해 동성동본의 혈연적 공동체 의식의 연결고리로 맺어진 안동 권씨의 동성마을을 이루고 있 다. 이 마을 권씨의 역사는 1520년 마을 입향조이며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충재(冲齋) 권벌(權橃, 1487∼1548)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터전을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이 마을의 안동 권씨가 ‘닭실 권씨’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큰 세력을 누리게 된 것은 권벌의 후대로 내려와, 벼슬과 학문으로 이름을 낸 후손들이 많아지고 인근 지역의 유력 성씨들과 통혼관계, 학문적 교류를 통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농경지 확대와 개간 등을 함으로써 경제력을 확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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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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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실마을에 터전을 마련한 후 안동 권씨는 지금까지 약 5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씨족공동체 의식과 활동, 상호작용을 통해 누층(累層)의 마을경관을 형성하였다. 마을이 처음 개척될 당시의 경관을 풍경화의 바탕 그림에 비유한다면, 그 밑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린 다음 물감을 칠하는 숱한 반복 과정을 통해 지금의 마을경관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봉화의 닭실마을은 도시문화의 영 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터라 전통적 마을경관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유교적 문화경관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유교적 문화경관이란 당시 유교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행태가 기능과 상징을 통하여 경관에 반영되어 나타남을 뜻한다.

조선시대 마을 조영의 중심이 되었던 사대부들은 그들의 유교적 이념과 사상을 실천하면서 새로운 경관 요소를 창출하여 종가, 사당, 재실, 정려, 서원, 정자 등의 독특한 유교문화 경관을 형성하였다. 열거한 경관 요소를 굳이 구분하자면 사당, 재실, 정려, 서원 등은 조상숭배와 존현숭덕(尊賢崇德)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한 ‘의례(儀禮)’ 기능의 공간이며, 정자는 학문수양을 위한 ‘수기(修己)’공간으로 대별된다. 물론 재실과 서원은 의례와 수기 두 기능을 모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닭실마을은 이러한 경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다.16)닭실마을 수구 밖의 봉화읍 삼계리에는 충재 권벌을 모신 三溪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1588년 건립되었으며 1660년(현종 1)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1897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60년에 복원되었다.

닭실마을의 가장 중심점이라 할 수 있는 장소, 곧 금닭이 품은 알에 해당되는 곳에 안동 권씨의 종가가 자리하고, 그 옆에는 권벌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준비하는 사당과 제청이 있다. 또한, 마을 서북쪽 골짜기 재궁골에는 안동 권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곳에 ‘추원재(追遠齋)’라는 재실을 두어 제사준비와 묘역을 관리하였다. 이처럼 종가의 사당이나 재실은 선조들을 위한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추모의식이 행해지며 후손들의 집회장소 역할도 한다.

이 마을에서 유독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는데, 바로 종가 한켠에 자리한 ‘청암정(靑巖亭)’이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88세에 마지막으로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가 걸려 있으며, 퇴계 이황, 번암 채제공 등 많은 시인묵객이 청암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청암정은 거북바위[龜巖] 위에 정자를 올려 온돌구조로 지었는데, 원래 거북이가 물을 가까이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물길을 돌려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거북이의 등 이 불에 데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 온돌을 없앴다는 것이다. 청암정은 정자의 운치를 더하기 위해 뜰에서 정자에 오를 때는 연못의 돌다리를 건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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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
청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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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에 해당되는 석천구랭이를 따라서는 솔숲과 맑은 계곡물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권벌의 아들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가 있다. 이러한 정자의 조경은 자연을 벗삼아 완상하며 학문에 열중하고 자기수양을 중요시하는 사대부의 자연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산과 물이 어울린 곳은 선비가 번잡한 세속에서 물러나서 즐겨 찾아가는 학문과 수양의 터가 되고 나아가 자연과 인간이 어울린 이상향이 되기도 한다. 청암정과 석천정사는 이 마을 자제들의 학문과 자기수양을 위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선비들과의 교유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닭실마을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경관이 많이 변했다. 신분구조의 변화와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는 전통적인 마을의 고유성과 상징성도 약화시켰다. 먼저 마을로 진입하기 위한 입구는 일제강점기의 신작로 개설과 광복 이후 영동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통과하는 큰 길은 예로부터 잡귀와 전염병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마을 입구에 나쁜 기운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장승이나 돌무더기, 솟대 등을 세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닭실마을 입구에는 높은 시멘트로 기둥의 청기와 솟을대문이 세워졌으며, 마을 안으로는 하천변에 제방이 축조되고, 마을 안길과 농로 등이 직선화되고 시멘트로 포장되었다. 또한,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의 유로가 정비되고, 마을 주변의 작은 필지의 농경지는 합배미 과정을 통해 필지당 면적이 확대되었다. 물론 농촌의 청장년층의 도시 이주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또한 주민 구성과 의식구조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 개인주의 사고와 조상숭배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는 등 동족 간의 유대도 과거보다는 긴밀하지 않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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