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1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
  • 03. 전통적인 입지 원리로서의 풍수와 취락
  • 마을과 풍수
  • 4.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
이용석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오봉4리) 강골마을은 죽송(竹松)이 울창하고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백로가 서식한다고 하여 강동(江洞, 강골)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강골마을은 약 950년 전 양천 허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후 원주 이씨가 500년 동안 거주하였고, 광주 이씨가 이곳에서 정착하게 된 것은 400년 전 무렵으로 전해진다. 이 마을은 광주 이씨(廣州李氏) 광원군파(廣原君派)의 동성마을로, 16세기 후반 무렵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골마을의 가구수는 약 40호가량 되는데 그 중 타성은 10여 호에 못 미치고, 그들 대부분도 광주 이씨와 혼척관계 등으로 맺어져 있다.

강골마을에는 광주 이씨의 정자인 열화정(悅話亭)을 포함하여 네 채의 건물이 각각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1984)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들이다. 중요한 집들 앞에는 각각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 특이하다.

강골마을을 둘러싼 산줄기의 흐름은 기러기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주산인 마을 뒷산이 마치 기러기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띠고 있다고 여긴다. 기러기는 갈대가 우거진 물가나 호수 등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민간에서 기러기는 부부금실, 다산, 평화로움 등을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상서로운 기운을 담고 있는 기러기의 모습을 띤 강골마을의 땅 모양새는 이 땅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치는데,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함은 이 기러기가 마을을 떠나지 않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연못을 만들고, 연못에 연을 심어 기러기가 늘 마을에 머물러 있기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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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정(悅話亭)
열화정(悅話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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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마을의 풍수형국 개념도
강골마을의 풍수형국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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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마을은 마을을 둘러싼 산줄기의 흐름과 모양새를 문자에 상응시켜 ‘也’자 형국으로 일컫는다. 가운데로 뻗은 획은 마을의 주산(主山)과 종가(宗家) 그리고 안산(案山)·조산(朝山)을 연결하는 중심축을 이루며, 나머지 획은 각기 좌청룡과 우백호 그리고 둥글게 마을을 감싸는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주산(120m)을 배경으로 자리한 종가는 책상 격인 안산으로 만휴정(晩休亭)과 솔동지의 높지 않은 두 봉우리를 두고 조산인 오봉산(五峯山, 284m)과 마주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주산 격인 마을 뒷산을 달리 이름하지 않지만, 안산은 예전에 이곳에 자리 잡았던 정자의 이름을 따서 ‘만휴정’이라 부른다. 또한, ‘솔동지’라는 이름은 이곳에 소나무 숲이 무성하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강골마을의 중심축 좌향은 서남향을 취하고 있으나, 개별 가옥들은 이 중심축을 따르기보다는 일조 조건이나 조망권을 따라 남향 혹은 득량만(得糧灣)을 향하여 열려 있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가옥도 많다.

풍수는 명당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잘 갖추어졌는가를 살피는 것이지만, 장소의 생태적 합리성, 자연경관과의 조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 배치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는 전통적인 자연관이자 입지관인 것이다. 강골마을을 전체적으로 둘러볼 때,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을의 수구(水口)에 해당하는 부분에 허결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수구 부분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본 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산중에서는 수구가 닫힌 곳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들판에서는 수구가 굳게 닫힌 곳을 찾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 는 물이 있어야 한다. 높은 산이나 그늘진 언덕이나, 역으로 흘러드는 물이 힘있게 판국을 가로막았으면 좋은 곳이다. 막은 것이 한 겹이어도 참으로 좋지만 세 겹, 다섯 겹이면 더욱 좋다. 이런 곳이라야 완전하게 오래 세대를 이어나갈 터가 된다.

강골마을의 수구에 견줄 수 있는 동남쪽의 마을 입구는 닫혀 있기는커녕 아무런 보호막이 없이 득량만을 향해 열려 있으며, 마을 앞을 지나는 경전선 철도와 도로에서 마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마을을 바닷바람으로부터 막고 외부로부터 마을 안팎을 시각적으로 경계 지으며, 마을 안에서는 좋은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강골마을의 수구를 막고 튼튼히 하는 비보의 방법으로, 만휴정의 산줄기에 잇대어 수형(樹形)이 아름다운 수종으로 새롭게 마을 숲을 조성한다거나 야트막한 둔덕을 만들어[造山] ‘야(也)’ 자의 마지막 삐침을 힘차게 뻗어봄은 어떨지 생각해 본다.

바닷가의 작은 마을이었던 강골마을이 이전까지는 경험하지 못하였던 큰 변화를 겪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의 경전선 철도부설(1922)과 득량만 방조제 축조(완공 1937)를 통한 대규모 간척사업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토목사업은 강골마을을 비롯한 득량만을 둘러싼 이 일대의 경제구조와 지역구조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득량평의 1,700㏊에 이르는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반농반어의 생업활동은 농업 위주로 재편되었고, 농경지와 철도역을 따라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으며, 촌락경관은 물론 주민의 의식구조에도 적지 않은 파장이 초래되었다. 물론 강골마을도 그러한 변화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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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강골마을 일대의 지형도
1910년대 강골마을 일대의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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