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1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
  • 03. 전통적인 입지 원리로서의 풍수와 취락
  • 마을과 풍수
  • 6.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양화리 가학동
이용석

수년 전 행정수도 이전 논의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노무현 정부의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화 전략의 핵심사업으로 추진되었던 행정중심 복합도시는 충청남도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포함하는 약 2,200만 평 규모로 개발되고 있다. 필자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행정중심 복합도시 예정 지역에 대한 문화재 조사를 담당하였고, 지역개발에 대한 이해관계와 지역 공동체의 갈등 양상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행정중심 복합도시 예정 지역이 연기·공주라고 하지만 원수산(元帥山, 254m)과 전월산(轉月山, 260m)을 배경으로 금강을 끼고 있는 장남평야 일대의 연기군 남면 진의리와 양화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다.

드넓은 금강변의 충적지인 장남평야와 원수산, 전월산은 행정도시의 입지 선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 나라의 도읍에 맞먹는 행정수도의 입지 선정에 다양한 요인이 고려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풍수적인 입지 요건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원수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전월산과 우백호의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미호천과 금강이 합수하여 감싸고 흐르며 멀리 계룡산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마치 서울의 땅 모양새를 축소하여 옮겨놓은 듯하다고 풀이하는 이도 있다. 실제로 풍수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도시가 들어설 후보 지역의 풍수 적 입지의 좋다 좋지 않다를 두고 다양한 견해가 신문지상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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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중심 복합도시 예정 지역
행정중심 복합도시 예정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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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남면 양화리는 연기·공주 일대에 거주하는 부안 임씨(扶安林氏)의 600년 세거지이며, 임씨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지 마을에서 만나는 주민들에게서 행정도시 이전으로 조상의 선영이 있고 대대로 자신들이 일구어온 고향의 삶의 터전을 잃을까 걱정하는 눈빛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양화리 일대를 ‘세거리(시거리)’라 부른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갈 수 있는 세 갈래의 길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한자로는 ‘삼기(三岐)’라 표기하였다. 세거리를 중심으로 부안 임씨가 오랫동안 터전으로 삼아왔다는 의미에서 세거리(世居里)라 표현하기도 한다. ‘세거리’라는 명칭은 때에 따라 양화리뿐만 아니라 부안 임씨의 영향권이라 할 수 있는 인근의 진의리, 송담리, 나성리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지역적 범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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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모각
숭모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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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임씨는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충청남도 공주·연기 일대에서 그 분포가 두드러진다. 2004년 8월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연기군 남면 인구 9,078명 가운데 부안 임씨가 1,962명으로 전체 인구의 21.6%를 차지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과 명망이 높다.

부안 임씨가 현재의 연기군 남면 양화리 일대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약 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입향조이자 중시조인 임란수(林蘭秀, 1342∼1407) 장군은 고려 말 공조전서의 벼슬을 거쳤지만,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세우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퍼져 전서공파를 이루어 양화리는 명실공히 부안 임씨의 공고한 터전이 되었다.

양화리는 행정구역상 1·2·3리로 나누어지는데, 양화1리는 임란 수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인 숭모각(崇慕閣), 제사 준비와 문중 모임의 장소인 전월재(轉月齋), 임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전월산 그리고 그와 관련된 많은 설화 등을 담고 있는 부안 임씨의 성스로운 장소이자 상징적 장소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양화2리(가학동)와 3리(평촌)는 임장군의 후손들이 보다 안정적인 거주지로 삼아 부안 임씨의 터전을 일군 곳이라 할 수 있다.

가학동(駕鶴洞)은 원수산과 전월산이 마치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자락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각각 10여 호 규모의 상촌, 월용, 곡말(곡촌), 학동, 아랫말 등 다섯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가학동에는 현재 약 70호가량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부안 임씨가 60호 내외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임씨 묘역에는 임란수 장군의 증손자인 주부공 임준(林俊)의 묘소가 있으며,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주부공파의 후손들이다.

가학동은 한자 이름 그대로 학을 타고 있는 마을이라 하는데, 동쪽의 전월산에서 마을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마치 학이 날아가는 모습을 띠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마을 가운데로 좁고 길게 내려오는 낮은 구릉은 ‘학선대(鶴仙臺)’라 부르며 학의 주둥이에 견줄 수 있다. 학의 주둥이 부분에는 이 마을 부안 임씨 세거의 역사와 맞먹는 나이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마을의 느티나무는 이곳 사람들의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은 학의 주둥이를 타고 신선과 같이 노니는 곳으로, 가학동은 번잡하고 속된 세상을 떠나 학의 날개와 품속에서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상향으로 삼을 만한 곳인 것이다.

이처럼 조상 대대로 땅을 일구고 평화롭게 살아오던 가학동이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로 술렁대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임영수씨는 “여기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는데 난데없이 행 정수도니 뭐니 해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됐다.”면서 “솔직히 행정수도가 우리 마을을 비껴갔으면 하고 바랐는데……”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행정수도가 들어오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터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거듭 말을 붙여온다. 국책사업 방향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앞선 사례를 통해 보면 개발중심의 가치관과 잣대로 쉽게 선을 그어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사업은 현지 주민들에 대한 현실적인 보상이나 이주 등 물질적·유형적 대책뿐만 아니라 뿌리와 고향의 상실, 혈연·지연 공동체의 갈등과 해체 등에 대한 깊은 고려와 대안을 갖춘 새로운 개념의 도시건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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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리 가학동 마을
양화리 가학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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