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1 전통적인 취락의 입지 원리와 풍수
  • 03. 전통적인 입지 원리로서의 풍수와 취락
  • 마을과 풍수
  • 7.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반곡마을
이용석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의 ‘반곡리(盤谷里)’라는 이름은 마을 밖을 감싸며 휘돌아 흐르는 삼성천과 금강, 그리고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둥근 소반(小盤)의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전한다.

풍수에서는 땅의 모양새를 두고 그에 상응하는 기운이 땅에 내재되어 있다고 여기는데, 마을이 들어선 모양새를 소반형에 비유하고, 소반이 가진 의미와 상징성으로 이 땅의 기운을 읽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소반은 쓰는 사람과 용도에 따라 다르지만 귀하고 정성들인 음식들이 올려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소반은 무언가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이 있는 공간으로, 평평한 소반 모양의 넓은 들은 알곡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삶, 곧 부와 영화를 상징한다. 또한, 해석하는 이에 따라 소반형에서는 소반 위에 올려지는 술병이나 그릇의 자리가 명당의 혈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하나의 형국에서 여러 개의 혈이 함께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어떻든 반곡리 마을 앞으로 넓게 펼쳐진 들은 소반을 두고 둘러앉은 마을 사람들을 대대로 먹여 살린 기름진 옥토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반곡리에는 약 120여 호가 살고 있는데, 그 중 여양 진씨(驪陽陳氏)가 70∼80여 호를 차지할 만큼 그 위세가 높다. 여양 진씨 외에도 경주 김씨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지만 그에 미치지는 못한다. 마을 입구에는 선조들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들과 정려(旌閭)가 자리하고 있어 진씨의 족세를 실감케 한다.

여양 진씨는 고려 인종 4년(1126)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진 진총후(陳寵厚)를 시조로 하는데, 이 마을에 진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약 16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조로부터 13세인 집의공(執義公) 진우(陳宇, 1514∼1534)가 중종 29년(1534)에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있을 때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정치를 비방한 죄인으로 몰려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무렵 일족이 세거하던 전라도 김제 일대를 떠나 그의 둘째 아들인 진한번(陳漢藩)이 선대(先代)의 덕을 입은 공주 일대 문인들의 후손의 도움으로 지금의 남면 양화리에 정착하려 하였다. 그러나 함께 온 고승이 금강 남쪽의 괴화산(槐華山) 아래가 대대로 세거할 만한 명당임을 일러준 것이 여양 진씨가 금남면 반곡리 일대에 정착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진씨가 양화리에 정착하지 못한 것은 이 일대에서 일찍부터 공고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부안 임씨의 터전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곧, 갈등과 간섭의 소지를 없애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반곡리를 선택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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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 정려(旌閭)
김해 김씨 정려(旌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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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군 남쪽을 동서로 관류하는 금강을 두고 강 북쪽의 남면 양화리와 강 남쪽의 금남면 반곡리는 각기 전월산과 괴화산을 두고 마주하고 있다. 두 산의 모양새를 견주어 보면 전월산이 힘있고 우람하게 솟은 장군형의 산이라면, 괴화산은 유려한 곡선의 미를 가진 여 인형의 산이다. 산은 그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심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대상물이 되는데, 이는 그 산의 형세가 사람들의 심성에 새겨져 그들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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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곡리마을
반곡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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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화산은 반곡리뿐만 아니라 이웃하는 석교리, 황룡리, 장재리, 석삼리 등의 마을을 품고 있는데, 비록 높고 아름다운 이름난 산은 아니지만 자식들을 정성껏 돌보고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는 우리네 어머니를 닮은 산인 것이다. 이처럼 산은 그곳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포근한 삶의 안식처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돌보는 숭엄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괴화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초가 되면 각 마을 주민들이 마을마다 모시는 산제당에 올라 경건한 마음으로 한 해 동안의 마을의 안녕과 일 년 농사에 대한 감사의 의례를 올렸다. 최근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이 본격화되고 마을 주민들의 이주가 이어지면서, 이제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세계적인 모범도시로 조성하겠다는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 이 땅과 이곳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삶을 화석화된 모습으로만 남길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의 문화를 온전히 기록하고 새로이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될 사람들이 그 문화를 함께 이어가고 꾸려갈 수 있는 문화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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