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2 생활공간
  • 02. 신분과 지위에 따른 위계적 공간
  • 사랑채,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다
김미영

유교가 거대담론으로 기능했던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덕목의 실천이야말로 완성된 인격체를 형성하기 위한 주된 요소로 여겨졌다. 이런 배경에서 일상생활의 대부분이 유교적 도덕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기제로 작용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남녀유별 관념에 따른 주거공간의 변천을 들 수 있다. ‘남녀칠세부동석’·‘남녀부동식(男女不同食)’ 등의 말이 있듯이, 유교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최고의 도덕적 덕목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유교이념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는 조선 중기 무렵이 되면 상류계층의 가옥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점차 분 화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가옥 구성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가진 전통적 방식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사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남녀 간에 내외를 하는 관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사랑채를 구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 초기로 접어들면서 가옥의 앞쪽에 사랑방과 그에 딸린 누마루가 한 칸씩 있는 형태가 보편화되기에 이르며, 조선 중기에는 사랑채라는 별도의 독립된 건물을 구비한 방식이 서서히 자리 잡아간다.38)서윤영, 앞의 책, p.117.

사랑(斜廊)과 사랑(舍廊)은 같은 음을 갖고 있지만 각각 다른 한자로 구성되어 있다. 기왕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斜廊)이란 중문에 가로놓여 손님을 접대하는 자그마한 공간이었으나 17세기 변화 과정을 겪으면서 청사(廳事)의 기능과 통합됨에 따라 18세기에는 규모가 큰 사랑(舍廊)으로 바뀌었다고 한다.39)김종헌 외, 「한국전통주거에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의 분화과정에 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2-9, 대한건축학회, 1996, p.2. 남자들의 주된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전면의 행랑채와 곳간 등과 같은 부속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이들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 구조는 건물의 핵심을 구성하는 사랑방을 중심으로 사랑대청·누마루·누다락·사랑마당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위락공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서 남성들의 각종 모임이나 여흥을 위한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사랑채에 머무는 바깥주인은 손님을 청하여 음식과 술을 대접하면서 담소를 즐기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를 ‘곡회(曲會)’라고 하였다. 아울러 ‘고회(高會)’라고 하여 시를 짓거나 서화를 그리는 등 선비의 품격에 걸 맞는 고고하고 격조 높은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 외 바둑과 장기 등을 두면서 시간을 보냈는가 하면, 나라 혹은 지역사회에 큰 일이 생기면 논의를 하는 장(場)으로도 기능하였다.

이처럼 사랑방에서 각종 모임이나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적절한 가구나 기물이 필요했는데, 이에 대해 신재효의 <박타령>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40)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속대관』 2, 1982, 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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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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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책상·가께수리·필연(筆硯)·퇴침(退枕)·찬합·등물(等物), 사서삼경과 백가어(百家語)를 가득가득 담은 책롱(冊籠), 철편(鐵鞭)·등채·환도(環刀)·호반(虎班) 기계 좋을씨고, 금합(金盒)에 매화(梅花) 피고 옥병(玉甁)에 붕어 떴다. 요지반도(瑤池蟠桃)·동정귤(洞庭橘)을 대화접시에 담아놓고, 감로수(甘露水)·천일주(千日酒)를 유리병에 넣었으며 당판책(唐板冊)을 보다가 안경 벗어 거기 놓고, 귤중선(橘中仙) 두던판에 바둑 그저 벌였구나. 풍로에 얹은 다관(茶罐) 붉은 내가 일어나고, 필통 옆에 놓인 부채 흰 것이 조촐하다. 질요강·침 타구(唾具)와 담배서랍·재떨이며 오동빨주·천은수복호박통(天銀壽福琥珀筒)·각색연통(各色烟筒)·수락화락·별(鼈)가죽에 맵시 있게 맞추어서 댓쌈이나 놓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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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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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보듯이 사랑방에는 책상이나 필연 등 학문생활에 필요한 기물, 매화와 붕어가 노니는 어항 등 수양(풍류)을 위한 기구, 바둑과 다관 등 여가생활의 도구, 요강과 타구 등의 취침도구, 담배서랍과 재떨이 등과 같이 일상적 생활들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취침을 비롯하여 식사 등과 같이 일상의 기본생활을 누리는가 하면, 학문(사서삼경)과 수양생활처럼 선비로서 당연히 익혀야 할 유교이념의 실천 역시 사랑방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까닭에 여타 건물에 비해 화려하고 웅장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높은 기단과 누마루이다. 낮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우는 안채와 달리 사랑채는 기단을 높게 쌓는 편인데, 대략 1∼2m 정도이다. 이는 건물의 기단을 높임으로써 아래의 부속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할 목적인데, 이로써 사랑주인의 권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략 누마루의 높이는 일어선 상태에서 마당에 있는 하인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가 가장 적합하다고 한다. 아울러 바깥주인과 방문객들이 누마루에 앉아 담장 너머로 펼쳐진 자연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가 적당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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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루
누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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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누마루는 대청과 분리되어 별도로 조성된 공간으로서, 선비들의 풍류공간인 정자(亭子)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대청과 달리 전면 및 좌우 양면 등 3면이 개방되어 내부에 앉아 있을 때 외부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간혹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더라도, 위로 들어 올리면 개방형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특히, 누마루는 일정 높이의 누하주(樓下柱)를 별도로 조성하여 사랑채의 여타 공간에 비해 한층 격상시킴으로써 권위와 상징을 부여하였다. 아울러 누마루의 난간을 다양한 조각으로 장식하여 사랑채 의 품격을 높이고자 했고, 이런 이유로 집을 세울 때 가장 신경을 쓴 곳 역시 누마루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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