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2 생활공간
  • 03. 내외관념에 따른 공간의 분리
  • 부부별침, 제도적으로 규정하다
김미영

1403년, 태종은 오부(五部)에 부부가 침실을 따로 쓰도록 명령을 내렸다.47)『태종실록』 권5, 태종 3년 5월 계묘. 이는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유교관념에 입각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 후계자 확보에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여온 유교의 가족이념에는 부합하지 않는 습속이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이질적이면서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는 문제이기도 했다. 즉, 남녀유별적 관념에 의해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명확히 구분할 것을 엄격히 적용하는가 하면, 남아의 출생을 통해 가문을 영속적으로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부부가 합방하기에 좋은 날을 받아 특별히 동침을 허용했는데, 이는 집안의 가장 웃어른이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개 시할머니나 시어머니 등 안채의 여성들이 날을 잡았으며 사랑채의 남성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수일 전에 날을 잡으면, 그때부터 부부는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좋은 기(氣)를 받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일력(日曆) 상으로는 좋은 날이더라도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치는 등 날씨가 궂으면 합방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48)서윤영, 앞의 책, p.129.

이윽고 부부가 합방하는 날, 초저녁부터 안채는 부산스러워진다. 여느 날 같으면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며느리 3대에 걸친 여성들이 한방에 모여 길쌈이나 바느질 등을 하면서 무료한 밤시간을 보내지만, 이날만큼은 며느리를 마냥 붙잡아둘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녁식사를 끝내고는 “오늘은 그만 건너가 거라.”하는 배려의 말을 건넨다. 이때 며느리는 이 말의 깊은 뜻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이런 모습이 내심 기특하기도 하지만, “어른 말을 듣지 않고 왜 그러느냐?”라고 가벼운 호통을 치고, 며느리는 그제야 겸연쩍은 듯이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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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와 안채의 비밀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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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부부합방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편이 공공연하게 안채로 향할 수는 없었다. 며느리가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깊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듯이, 남편 역시 집 안의 사람들이 깨어 있는 이른 저녁시간에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드는 것은 유가(儒家)의 법도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것이다. 남편은 가족 모두가 잠들어 있는 밤시간을 틈타 안채로 향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행여 남의 눈에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중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이용했다. 이는 중문을 거쳐 안마당을 통하지 않고 안채 뒤편이나 측면에 나 있는 쪽문으로 아내가 기거하는 건넌방의 옆문(뒷문)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고안된 부부만의 은 밀한 통로였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이 머무는 작은 사랑방의 벽장문을 열면 안채의 건넌방으로 통하는 길을 마련해 두거나 다락으로 올라가 사다리를 통해 안마당으로 내려오는 등의 방법도 이용되었다.49)앞의 책, p.130.

이처럼 늦은 밤시간에 안채와 사랑채의 비밀통로를 거쳐 아내와 해후의 시간을 보낸 남편은 사랑채로 돌아올 때에도 가족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새벽시간에 안채를 나서야 했다. 간혹 모처럼 만난 정겨운 아내와의 단잠에 빠진 탓에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뒤늦게 허겁지겁 안채를 빠져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대개 이런 날 안채에서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일찍 돌려보내지 않고, 무슨 상스러운 일이냐!” 하는 호통이 울렸으며, 사랑채에서도 역시 “아랫사람들에게 체모를 지키지 못하는 행동을 하다니!”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혼인을 통해 배타적 사랑을 허용받은 부부의 만남에도 정해진 격식과 법도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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