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2 생활공간
  • 03. 내외관념에 따른 공간의 분리
  • 안방물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방을 바꾸다
김미영

여성들의 전용 공간인 안채에는 안방과 건넌방이 주된 공간이다. 이때 안방에는 주부권을 보유하고 있는 여성이 기거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주부(主婦)’라는 용어는 『예기』의 ‘주부합비입우내(主婦闔屝立于內)’라는 대목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집안의 아내 혹은 며느리’라는 뜻을 지닌다.50)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 , 태학사, 1997, p.944. 국어사전에는 ‘한 집안 주인의 아내’로 풀이되어 있다. ‘한 집안의 주인’이란 가장을 일컫고 그의 아내가 바로 주부인 것이다. 가장과 주부는 남녀 역할구분에 따른 지위의 명칭으로 가장이 바깥일을 주로 행한다면 주부는 집안일을 담당한다. 이런 이유로 가장을 ‘바깥주인’·‘바깥어른’·‘바깥양반’이라고 하 며, 주부를 ‘안주인’·‘안어른’ 등으로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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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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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래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유교적 가족이념에 의해 가장권과 주부권의 영역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이를테면 집안의 경제생활에서 가장은 수입과 관리를, 주부는 소비를 담당한다. 아울러 종교생활에서도 가장은 유교식 조상제사를 담당하고, 주부는 성주를 비롯한 가택신을 모시면서 이를 관할한다. 자녀양육의 경우 딸의 교육은 어머니가 전담하고 아들은 안채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사리분별을 하기 시작하는 7세 정도가 되면 남성 전용 공간인 사랑채로 건너가서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교육을 받게 된다.

주부의 역할 중에서 가족들의 식생활, 특히 식량관리는 주부의 고유 권한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곳간 관리권이다. 가족들의 식량을 저장해 두는 곳간은 집안 여성 중에서도 주부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가장은 수확철을 맞이하여 곳간에 식량을 넣고 나면, 이를 사용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주부에게 맡기는 것이 관행이다. 수확한 곡식을 곳간에 저장해 두면서 집안 친척들에게 분배하거나 이듬해 수확철까지 가족의 식량으로 남겨두는 일은 안주인의 고유 역할이자 권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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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혼 여성의 생애주기 변화
기혼 여성의 생애주기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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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살림에 대한 막대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주부에게는 공간 사용에서도 이에 합당한 예우를 해주는데, 즉 안채의 핵심 영역인 안방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안방마님’이 안주인을 지칭하고 있듯이 ‘안방’은 주부인 안주인의 상징적 공간이다. 그런데 모든 지위에는 계승이 수반되게 마련인데, 주부권 역시 일정 시기에 이르면 넘겨주어야 한다. 다만, 시기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는 않고 대개 시어머니가 환갑을 맞이할 무렵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로 전하고 있지만 집안마다 차이가 있다.

안동 지역 의성 김씨 청계종부51)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김효증(82세).는 17세 때 종손과 혼인하여 두 명의 딸을 낳은 다음 26세 되던 해에 아들을 출산하면서 주부권을 물려받았는데, 당시 시어머니는 58세였다. 이와 관련하여 위의 표를 보면 여성들은 혼인을 계기로 “고초·당초 맵다 한들 시집살이보다 더 하랴.”라는 말이 있듯이, 힘든 학습시기를 거치게 된다. 그야말로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단한 생활을 보내는 며느리로서의 지위이다. 이후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시어머니로부터 주부권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로써 안살림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보유한 주부로서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아들이 혼인을 하여 며느리가 아들(손자)을 출산하면 그때 주부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주부권을 물려주고 받으면서 기거하고 있던 방을 서로 바꾼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주부권을 넘겨준 것을 “안방 물려주었다”라고 하며, 주부권 이양을 ‘안방물림’이라고 한다. 즉,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주부권을 물려주면서 그동안 거처하고 있던 안방을 내주고 자신은 건넌방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로써 안방을 차지하게 된 여성은 그야말로 ‘안방마님’으로 불리면서 집안 살림에 대한 통솔권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주부권을 물려받은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안방의 삼신과 안대청의 성주신 등 가택신을 관할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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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청에 모셔진 성주신
안대청에 모셔진 성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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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부권 이양을 계기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실제로 어떤 형태의 방 바꾸기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안동 지역 의성 김씨 청계종가의 가옥 평면도를 참고하면, 남성공간인 사랑채와 여성공간인 안채가 좌측과 우측으로 각각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청계종부가 17세에 혼인하여 주부권을 물려받을 때까지 시아버지는 사랑대청 바로 옆에 자리한 ‘사랑1’에, 종손과 시동생들은 ‘사랑2’에 기거하고 있었으며, 안채에서는 시어머니가 ‘안방’을 사용했으며, 종부는 ‘방1’에 거처했고 ‘방2’에는 시누이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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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 청계종택
의성 김씨 청계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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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종부가 26세에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주부권을 물려받았다. 주부권을 이양하는 날, 시어머니는 종부에게 곳간 열쇠와 사당 열쇠를 건네주고 하인을 시켜 짐을 꾸리게 한 다음 ‘사랑2’로 거처를 옮겼다. 일반적 관행에 따르면 안방에 거처하고 있던 시어머니는 ‘방1’처럼 안채 안에서 이동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를 지키지 못한 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었다. ‘사랑1’에 기거하고 있던 시아버지가 수년 전 세상을 뜨고 나서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주부권을 이양함으로써 행해지는 여성들의 ‘방 바꾸기’와 마찬가지로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성들, 곧 아버지와 아들도 방을 바꾸는 것이 관례였던 까닭에 종손 역시 ‘사랑2’에서 ‘사랑1’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시어머니는 “바깥으로 드러나 있는 ‘사랑2’의 불이 꺼져 있으면 보기 흉측하다”라고 하면서 그곳으로 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방1’은 종부의 두 딸이 기거하게 되었으며, 종부는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안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처럼 안방은 집안 여성들에게 막대한 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다만 이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후계자인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전제되었다. 이런 이유로 아들 출산이 늦어진 탓에 좀처럼 안방을 물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런가 하면, 평생 아들을 낳지 못하여 안방을 차지하지 못한 채 뒷방신세로 전락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야말로 안방은 기혼 여성들이 꿈꾸었던 최고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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