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2 생활공간
  • 04.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이적 공간
  • 정침, 삶과 죽음이 공존하다
김미영

『주자가례』에서는 임종이 가까워지면 ‘천거정침(遷居正寢)’이라고 하여 병이 깊어진 환자를 정침으로 옮기도록 명시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정침은 천자·제후·경대부·사(士)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구비하고 있던 가옥의 핵심 공간이었다. 특히, 군주(제왕)의 경우 반드시 정침에서 승하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이를 ‘정종(正終)’이라고 하였다.52)조재모, 「조선왕실의 정침 개념과 변동」,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6, 대한건축학회, 2004, pp.191∼192.

『주자가례』의 ‘사당도’를 보면 우측(西)에 두 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주석에서 설명하기를 “앞의 건물은 청사(廳事)로서 예전의 정침에 해당하는 것이며, 뒤편의 것은 정침인데 예전의 연침(燕寢, 거처공간)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가옥 구조와 비교해 볼 때 정침은 살림채, 청사는 제청(祭廳)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53)장철수, 『사당의 역사와 위치에 관한 연구』, 문화재연구소, 1990, p.32. 그런데 정침은 입식생활을 하는 중국의 가옥 구조에 기초하여 마련된 공간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의 정침을 도입할 때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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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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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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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정침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략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길례 등을 거행하는 제사청이나 재숙소(齋宿所)를 의미하는 것, 둘째 연거(燕居)의 공간, 곧 정당(正堂)이나 안채를 의미하는 것, 셋째 궁궐의 의례를 거행하는 전각이나 군주의 승하 장소를 의미하는 것 등인데,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 경희궁의 자정전(資政殿) 등이 정침에 해당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 정침은 역대 왕들의 승하장소로 이용된 적이 전혀 없으며 대부분 침전 용도의 공간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사정전의 바닥은 마루였기 때문에 추운 겨울철이 되면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는 만춘전(萬春殿, 사정전 동쪽에 위치)과 천추전(千秋殿, 사정전 서쪽에 위치)을 왕의 집무실로 이용하였다. 이는 바닥에 벽돌을 깔아 입식생활을 하는 중국의 가옥 구조와 달리 온돌방을 주된 거처공간으로 삼고 있던 우리의 생활습속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궁궐의 경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온돌이 확산된 일반 가옥과 달리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벽돌과 마루로 된 건물이 주를 이루었고 온돌이 마련된 곳은 내전에만 국한되었다.54)선조 무렵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온돌을 대폭 확산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재모, 앞의 논문, p.197) 그러다 보니 정침이 아닌 온돌이 설치된 별도의 건물을 왕의 침전 및 승하 장소로 이용했던 것이다.

용도에 따른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궁궐과 달리 최소한의 건물로만 이루어진 일반 가옥에서 마룻바닥을 깐 정침 공간을 조성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민간에서 통용되고 있는 여러 관행들로 미루어볼 때 안채를 정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정침이 안채 그 자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안채의 특정 공간을 일컫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55)김수일, 『귀봉선생일고』, 잡저, 「終天錄」.

돌아가신 직후의 예(禮)인 상침(牀寢)을 치우고 바닥에 눕히는 절차를 시행하지 못하였다. 속굉(屬纊)을 하고 곡읍(哭泣)하고 피용(擗踊)할 때를 당하여 무슨 겨를이 있어 자리와 요를 바닥에 깔고 숨이 끊어질 때를 기다리며, 몸을 부축하여 그 위에 놓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중국인의 정침은 모두 벽돌로 깔아 만들었기에 침상을 제거하면 바로 바닥이 되지만, 우리나라 가옥은 이미 정침의 풍습이 없어졌다. 정침이라고 하는 것은 의례적으로 목판을 깔아 바닥에서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바닥에 눕히는 절차는 형편상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위의 내용은 김수일(金守一, 1528∼1583, 호는 龜峰)이 부친 김진(金璡, 1500∼1580, 호는 靑溪)의 장례를 치르면서 기록해 둔 일기 「종천록(終天錄)」의 일부이다. 그런데 내용 가운데 “정침이라는 것은 의례적으로 목판을 깔아 바닥에서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라는 대목으로 보아 정침은 마루바닥의 공간, 곧 대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때의 대청이 제청·안채·사랑채에 속한 마루인지, 아니면 정침 용도로 이용하기 위해 별도로 조성된 공간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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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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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정침이란 마룻바닥의 공간이었던 것은 확실한 듯한데, 다만 문제는 임종을 위한 ‘천거정침’의 수행이다. 침상을 사용하지 않는 우리의 주거습속에서 마루는 몸을 눕히는 공간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다. 특히, 병이 중한 환자를 마룻바닥에 눕히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할 수는 더더욱 없다. 이런 이유에서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를 방으로 옮겼을 터인데, 조선시대 왕들 역시 경복궁에서 정침으로 이용되었던 사정전에서 승하했던 경우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 침전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정침이었던 사정전의 바닥은 마루였던 까닭에 눕거나 잠을 청하는 침전으로 이용하기에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이에 온돌이 마련되어 있는 별도의 건물을 침전으로 사용했으며,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가의 대청 역시 제사를 거행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정침으로서의 기능은 수행하고 있었으나 ‘천거정침’에서만은 온돌이 마련된 방에 밀려나게 된 것이다.

『사례편람』에 따르면 정침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는 집안의 가장(家主)에 국한되고 나머지 가족은 생전에 거처하던 곳으로 옮기도록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정침의 위상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안채(안방)를 정침으로 간주하는 것이 보편적 경향이지만, 실제 임종이 가까워진 남성을 안방으로 모시는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대개 남자는 사랑방에, 여자는 안방으로 옮겨 임종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56)임재해, 『전통상례』, 대원사, 1990, pp.18∼19. 이는 남녀를 구별하는 내외관습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 역시 사랑채와 안채의 구분이 없는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습속이다.

가옥의 핵심 공간인 정침에서 임종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은 죽음으로 인해 생(生)의 공간을 벗어나는 망자에 대한 최고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임종 이후에 행해지는 모든 의례에도 적용되고 있다. 병이 깊어진 환자가 정침에서 임종을 맞이하면 그곳에서 염습 등을 거친 후 망자의 혼(魂)이 담긴 혼백은 영좌(靈座)에 안치된다.57)『예서』와 달리 실제 현장에서는 남녀유별적 관념에 의해 안채의 폐쇄성이 강화되면서 외부인들이 드나들기 쉬운 사랑채에 빈소를 마련하는 경향이 강한데, 다만 사랑채에서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작은 사랑방이나 책방 등이 주로 이용된다(윤일이·조성기, 「조선시대 사랑채 의례공간의 특성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논문집』 53, 1997, p.150.) 다만, 생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육신은 관 속에, 혼은 영좌 위의 혼백에 각각 분리되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침저녁의 밥상[上食]을 비롯하여 빗과 세숫물을 진설하는 등 평상시와 유사한 대접을 받는다.

특히, 염습을 비롯한 일련의 절차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망자의 머리를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향하도록 하는데, 이에 대해 “빈(殯)에서는 머리를 남쪽으로 하는데 차마 그 어버이를 귀신으로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사를 지내면 죽은 일을 마치기 때문에 장사를 지내고서야 비로소 머리를 북쪽으로 한다.”58)임민혁 옮김, 『주자가례』, 예문서원, 1999, p.362.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이미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다한 육신이지만 생전의 거주공간인 정침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생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는 정침을 떠나는 망자에게 베푸는 극진한 예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정침에 마련된 빈소에서 일정기간 머물고 나서 장지로 향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정침과의 완전한 분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비록 육신은 묘소에 머물고 있지만 신주에 깃든 망자의 혼은 정침(빈소)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에도 생의 세 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다름 아닌 상식(上食)의 습속이다. 예서에 따르면 망자의 혼이 빈소에 머물고 있는 약 2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데, 이는 우제·졸곡·부제·소상·대상 등과 같은 제사의 거행과는 별도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상식은 생전의 밥상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식을 차릴 때에도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차리는 등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새를 하는데, 이는 밥은 오른쪽에, 국은 왼쪽에 진설하는 제사상과 크게 차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시신이 아닌 신주의 형태로 정침으로 돌아온 망자에게 지내는 우제(虞祭)부터는 의례의 명칭과 초헌관이 달라진다. 즉, 육신이 아직 빈소에 머물고 있는 경우에는 체백(육신)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에 ‘전(奠)’이라고 하면서 축관이 술을 따르는 등 의례를 주관하지만, 체백이 사라진 이후에는 ‘제(祭)’라고 하여 상주(적장자)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만, 이때에도 완전한 조상신으로서의 지위는 아직 확보하지 못한 채 빈소에 머물게 되는데, 이후 망자의 혼(신주)은 소상과 대상, 그리고 담제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길제를 지내고 나서 사당에 안치되어야만 확고한 조상신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생의 공간인 정침을 벗어나 사당으로의 공간적 이동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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