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2 생활공간
  • 05. 어느 유학자가 꿈꾸었던 집
김미영

조선 중기의 유학자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는 학문이 뛰어나 인조 때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냈고, 이조참의와 대사헌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덕망이 높은 학자였으나 1675년(숙종 1)에 일어난 2차 예송논쟁의 과정에서 남인들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되었다가 5년 반 만에 풀려났다.

이유태는 영변의 유배지에서 자신이 꿈꾸고 있는 이상적인 집을 『초려집』에서 밝히고 있는데,61)신영훈, 『한국의 살림집』 상, 열화당, 1983, pp.48∼52 재인용. 이는 당시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먼저 기와집 5칸을 짓는다. 동미(棟楣)의 길이는 8자가 좋겠고, 보의 길이도 9자는 되어야만 1칸 크기에 알맞다. 1칸은 방실(旁室, 방)로 삼아 아들이나 딸에게 주고, 다른 칸은 판방(板房, 마루방)으로 꾸며서 일용하는 물건을 보관하도록 하고, 다음 2칸은 침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1칸은 부엌으로 쓴다. 거기에 초가 1칸을 연결시켜 찬방(饌房)을 만든다. 보간 9척 중 7척의 길이에 벽을 치고 문짝과 창을 단다. 나머지 2척과 처마 아래에다 마루를 깔아 전당(前堂)을 만든다.

이유태가 유배지 영변에서 꿈꾸고 있었던 가옥은 5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성종 때 규정된 제4차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따르면 서민은 10칸 이하로 제한되었으며 3품 이하는 30칸이었는데, 양반의 신분으로 5칸의 가옥을 꿈꾸고 있었다면 참으로 소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기와집 한쪽으로 한 칸 규모의 초가를 세워 음식 등을 보관하는 찬방으로 사용하고 마룻바닥을 깐 전당을 만들겠다는 점에서는 상류계층의 가옥 분위기가 다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전당이란 제례와 접객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말하는데, 이는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 장소로서 서민 가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크면 이 집은 좁아질 것이다. 남자들은 외청(外廳)을 지어 나가고 자녀들을 위해서는 방사(旁舍)를 따로 지어 주어 부인들의 씀씀이가 넉넉하도록 해야 된다. 방사의 규모는 3칸이 좋다. 1칸은 마루방으로 하여 일용품을 넣어두고, 1칸은 방을 만들고 1칸은 부엌이어야 한다. 자녀가 많지 않은 사람은 신부를 여기에 살게 하면 된다. 또는 사위를 맞이할 수도 있다. 나는 이들 건물 말고도 중옥(中屋) 3칸이 달리 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침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우되 초가이면 족하다. 3칸 중의 2칸은 곳간이어야 하고, 나머지 1칸은 헛간으로 하여 땔나무 등을 쌓아두어야 한다. 안마당은 필요 이상으로 넓지 않아야 한다. 좌우로 담장을 쌓고 중문을 세우고, 밤이면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 5칸 규모의 기와집을 세우고 싶다는 이유태의 꿈은 자녀들이 아직 어리다는 전제하의 소망이었으며, 자녀들이 성장하면 가옥을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외청, 곧 사랑채를 지어 남자들의 주거공간을 별도로 조성하겠다는 생각도 밝히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여성공간인 안채 좌우로 담장을 쌓고 중문을 설치하고 늦은 밤에는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는 등 유교이념을 실천하는 유학자답게 내외관념에 따른 남녀유별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5칸의 기와집을 지어 2칸은 침실, 1칸은 자녀들 방, 1칸은 부엌, 나머지 1칸을 창고로 사용하겠다는 이유태의 당초 소박한 꿈은 시일이 지나면서 3칸 규모의 헛간을 구비하고 또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된 그야말로 전형적인 상류계층의 가옥으로 자리 잡게 된다.

나는 또 생각한다. 사랑채[廳事]는 기와집 3칸이면 족하다고 본다. 2칸은 방을 꾸미고 1칸은 당(堂)으로 한다. 당과 방 사이에 역시 쌍지게문을 내고 제사 때는 여기서 제례를 거행하도록 한다. 가장은 새벽녘에 일어나 앉아 하루 동안 일꾼들이 할 일의 양을 생각하고, 그런 다음 일일이 지시하되 만일 태만한 녀석이 있으면 벌을 준다. 나는 또 마구 3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랑채의 이웃에 있어야 한다. 사랑채의 북쪽 창문을 열고 바라다볼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좋다. 2칸은 말 한 필과 소 한 필을 넣어두고 여물도 간직하도록 하고, 나머지 1칸에는 목노(牧奴)가 숙식하는 방을 들였으면 한다. 사랑채와 마굿간과의 사이에는 좀 널찍한 터전이 있어 가을걷이를 하면 좋으리라. 혹은 마굿간을 정침 앞쪽에 두어도 좋겠다. 정침 앞쪽에 마당이 있고, 그 끝에 낮은 담장을 쌓고 마굿간을 둔다. 담장의 높이는 방이나 툇마루에 앉아 말의 등이 보이고 목노의 행동거지를 살필 수 있을 만하면 된다.

3칸 규모의 사랑채에서 2칸은 방으로 꾸미고 나머지 1칸에는 당(堂)을 만든다고 했는데, 이는 제례를 거행하는 제청공간을 말한다. 아울러 방과 당 사이에 지게문을 설치하는 까닭은 제례에 참여하는 제관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구 3칸을 마련하되, 사랑채 창문으로 머슴의 행동거지를 살필 수 있는 거리에 세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행랑채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계속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채 옆으로 서실(書室) 2칸이 있으면 좋겠다. 초가집으로, 아이들이 글 읽는 장소로 쓴다. 쓸데없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친척이나 이웃집 아이들도 공부하는 아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게 한다. 남자들은 바깥채에 머물고 여자들은 안채에 산다. 남자가 열 살이 되면 바깥 사랑채에서 먹고 자며, 여자 형제와 내당(內堂)에서 만날 때에는 함께 앉지 못하게 하고 농담을 주고받지 못하게 한다. 또 남자와 여자가 같은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측간 사용도 각기 하도록 한다. 또 하인들을 부릴 적에는 머리를 깨끗이 빗게 하고 정결한 옷을 입게 한다. 남자 하인은 안마당을 쓰는 일 이외에는 중문 안에 들이지 말아야 하고 부엌 출입은 더욱 못하게 하여야 된다.

자녀들의 글공부를 위해 사랑채 옆에 서실 2칸의 건립을 생각하고 있다. 사실 양반집의 자녀들이 서당에 다니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유능한 선생을 집으로 초빙하거나 친인척 중에서 학문이 높은 이들에게 드나들면서 글공부를 하곤 하였다. 따라서 집 안에는 아이들이 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집안 남자와 여자의 행동역할을 뚜렷이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남자아이가 열 살이 되면 안채에서 사랑채로 옮겨와 살되 여형제들과 함께 앉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아울러 집안 남녀들에게 엄격한 내외규칙을 적용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화장실과 우물을 함께 사용하지 못 하도록 금하고 있는데, 이는 안채와 사랑채처럼 주거공간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런 집을 짓고, 이런 법도로써 나는 내 집을 다스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지금 영변 땅에 귀양 온 지 3년이다. 내가 치산(治産)하지 못하였고, 이렇게 귀양살이를 함에 따라 마땅한 내 집이 없기에 이와 같은 새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 글인 『초려집』에 내 꿈속 집의 형상을 적어두려는 것이다.

이유태는 영변 유배지로 향할 당시 69세의 고령이었다. 71세에 이 글을 썼으며, 3년 후인 74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78세였다. 이유태가 유배지에서 품고 있었던 이상적 집을 세우겠다는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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